위-피싱 사이트, 아래-실제 사이트
“서울지방검찰청 김지훈 수사관입니다. 광명시에 사는 김태호씨라는 분을 알고 계십니까? 김태호씨가 대포통장 사건에 연루돼 수사 중인데 박효선씨 명의로 된 하나은행, 농협 대포통장을 발견했습니다.”지난달 말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김지훈 수사관이라고 소개한 한 남성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뜸 “김태호씨를 아느냐”고 묻는 그의 말투는 긴급했다. 어눌한 조선족 말투가 아닌 똑부러진 표준어를 쓰며 금융거래법을 운운했다. 전화기 너머로는 많은 사람이 조사 받는 듯한 어수선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이번 사건 피해자가 200여명 정도로 파악된다”며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상태라 박효선씨가 피해자임을 입증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이스피싱이 아니냐고 물어보자 오히려 그는 “저희도 그런 의심 때문에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사건번호 불러 드릴테니 메모하라”고 정신을 쏙 빼놓았다.
◆ 똑부러진 표준어에 당당한 말투
자칭 김지훈 수사관이 설명한 사건경위는 이렇다. 최근 경기도 광명시에 사는 40대 남성 김태호라는 인물이 경찰에 검거됐다. 김태호씨와 그 일당이 기자의 이름으로 농협과 하나은행 통장을 개설했다. 이 계좌로 5000만원 상당의 불법 자금을 거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이어 검사라고 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넘겼다.
검사라고 지칭하는 남성 역시 완벽한 표준어를 구사하며 압박했다. 자칭 검사라고 하는 자는 “김태호 일당이 거래한 대포통장은 중국 뿐 아니라 국내 중고나라에서도 거래됐다”며 “일부 피해자들은 당신을 고소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피해자 입증을 받아야 혐의를 벗는다며 거듭 강조했다.
전화를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가해자라는 누명을 필사적으로 벗고 싶다. 그래서 자칭 검사가 묻는 질문에 그대로 답하게 된다.
그는 농협과 하나은행 외 개설한 계좌와 잔액을 요구했다. 이어 거래 은행과 통장 잔고 상태를 물었다. “현재 주거래 은행 잔고조차 이것저것 다 빠져나가 1만원도 남아있지 않다”고 답하자 그는 “정확하게 대답하셔야 한다”고 화를 냈다. 이어 “모든 통장에 있는 잔고를 한 곳에 몰아넣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때부터 의심이 들었다. 전화를 끊어버리고 1시간 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없는 번호라는 안내만 흘러나왔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김태호’와 ‘농협·하나은행’ 등을 입력하자 비슷한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은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들 보이스피싱이 요구한대로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해 계좌번호와 보안카드 등을 포함한 개인정보를 모두 넘긴 사람도 있었다.
◆ “못 잡아요” 손 놓고 있는 경찰·금융당국
보이스피싱을 신고하기 위해 경찰서에 전화했지만 “실제 피해가 없고, 전화번호만으로는 처벌이 어렵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금융감독원에도 1332로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번호를 알려달라”는 요구 뿐이었다. 보이스피싱 조직의 수법은 갈수록 교묘해지고 사기 피해 규모도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지만 경찰이나 금융당국은 시늉만 낼 뿐 사실상 손 놓고 있는 모습이다.
금감원에 따르면 지난해 보이스피싱 금융사기 피해액은 2165억 원으로 전년(1365억원)에 비해 58.6% 늘었다. 보이스피싱 피해액에 대한 공식 집계가 시작된 2012년(1154억 원)과 비교하면 2년 새 2배 수준으로 증가한 셈이다. 보이스피싱 금융사기에 이용된 대포통장의 수는 지난해 4만4705건에 달했다. 대포통장 수는 2012년 3만3496건, 2013년 3만8437건 등 꾸준히늘었다.
설마 내가 당하겠어 싶은 금융사기, 생각보다 더 교묘하고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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