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증과 도장만 있으면 입출금통장 발급이 가능합니다 고객님.” (OO저축은행 콜센터 직원)

보이스피싱 등 대출사기가 기승을 부리면서 시중은행과 우체국 등 주요 금융기관이 입출금(요구불)통장 발급기준을 까다롭게 적용하지만 저축은행은 기존과 비슷한 기준으로 입출금통장을 발급해주는 것으로 확인됐다.


<머니위크>가 4개 저축은행을 대상으로 본인이 직접 신규통장을 발급하는 데 필요한 서류가 무엇인지 취재한 결과 4개 저축은행 모두 신분증과 도장만 있으면 신규계좌 개설이 가능했다.


/사진=뉴시스DB

일부 저축은행은 신분증만 있어도 신규계좌가 발급된다. 다만 이 저축은행은 신규계좌 개설을 위해선 예금이나 적금 중 하나 이상을 가입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대포통장을 만들 수 있는 셈이다.

시중은행들이 최근 고객불만에도 불구하고 대포통장과 전쟁을 벌이는 데 비해 저축은행은 피해사례와 피해규모가 미미하다는 이유로 이를 외면하는 것.

하지만 전문가들은 대포통장 발생이 시중은행에서 저축은행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저축은행 자체적으로 통장발급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시중은행, 뒤늦게 대책 마련

대포통장이란 금융실명제를 위반하고 제3자의 명의를 도용해 만든 통장으로 실사용자와 명의자가 다른 통장을 말한다. 최근엔 보이스피싱 등 각종 범죄에서 사기피해자금의 수취수단으로 사용된다. 대포통장은 지역농협과 우체국 등에서 빈발했는데 최근 시중은행과 새마을금고로 확대되는 추세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전체 대포통장 중 은행권 비중은 2014년 상반기 36.1%에서 같은해 말 76.5%로 급등했다. 이 가운데 새마을금고 비중은 2013년 4.5%에서 2014년 14.1%로 증가했다.

이처럼 대포통장이 기승을 부리자 시중은행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신규계좌 발급조건을 강화했다. 고객에게 신분증과 도장은 물론 통장 개설목적과 이에 대한 증빙서류까지 별도로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예컨대 KB국민은행은 개인이 계좌를 개설할 경우 급여계좌 증빙서류와 근로소득원천징수영수증, 급여명세서 중 하나 이상을 제출하도록 했다. 법인(사업자)계좌를 개설할 경우에도 물품공급계약서(계약서), 세금계산서, 부가가치세증명원, 납세증명서 등을 내야 한다. 아르바이트 계좌 때문에 통장을 개설할 경우엔 고용주의 사업자등록증이나 근로계약서 등 고용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서류를 발급해 제출해야 한다.

만약 관련 서류를 증빙해도 은행이 대포통장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면 통장개설이 안된다. 이는 KB국민은행뿐 아니라 신한은행, 우리은행, 농협은행 등 전 은행권에서 확대적용 중이다.

이처럼 시중은행이 대포통장과 전면전에 나서면서 지난해부터 은행권 대포통장 발생건수가 다시 줄어드는 추세다. 금융감독원 금융사기대응팀에 따르면 대포통장 발생건수(피싱사기 기준)는 2012년 3만3496건에서 2013년 3만8437건, 2014년 4만4705건으로 증가했다가 지난해 말 기준 2만2759건으로 절반가량 줄었다. 대포통장 피해규모 역시 2014년 1637억원에서 지난해 1399억원으로 감소했다.


서울중앙우체국 직원들의 '대포통장과의 전쟁' 퍼포먼스. /사진제공=서울지방우정청

◆저축은행, 풍선효과 우려
시중은행에서 대포통장이 늘어난 것은 이른바 풍선효과 영향이 크다. 그동안 대포통장을 이용해 사기를 친 범죄자들은 주로 단위농협과 새마을금고, 우체국 계좌를 이용했다. 지점이 전국에 분포돼 있고 시중은행보다 보안 등 관리감독이 허술한 점을 악용한 것이다.

금융감독원이 이들 금융사에 신규계좌 발급조건 강화를 요구하자 범죄자들은 시중은행을 주타깃으로 삼았다. 상대적으로 시중은행의 계좌발급조건이 덜 까다로워진 탓이다.
앞으로는 어떤 흐름으로 이어질까. 범죄가 지능화되면서 이들은 저축은행 통장으로 갈아탈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방식의 풍선효과가 나타날 것이란 분석이다.

저축은행의 신규계좌 발급조건은 이렇다. A저축은행의 경우 입출금계좌 개설 시 신분증과 도장 혹은 서명만 있으면 쉽게 통장을 발급해준다. 가족이 방문할 경우 예금주의 신분증과 대리인 신분증, 도장, 가족관계증명서만 있으면 된다. 제3자도 발급받을 수 있다. 제3자 방문 시 예금자 신분증과 대리인 신분증, 도장, 위임장, 인감증명서 등만 제출하면 된다.

단, 계좌 개설 시 다수 계좌 개설 및 대포통장 명의인 정보조회가 뜰 경우 한달 혹은 두달가량 개설하지 못하게 제한을 뒀다. 시중은행에 비해 통장발급이 용이하고 대포통장 명의인 정보조회가 뜬다고 해도 한두달만 지나면 신규계좌 개설이 가능해 관리가 허술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이는 A저축은행뿐만 아니라 모든 저축은행이 공통적으로 도입한 시스템이다.

이와 관련 금융감독당국은 순차적으로 계좌발급조건을 강화하기로 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대포통장 비중을 보면 90%가량이 시중은행과 단위농협, 새마을금고, 우체국에서 발생됐다”며 “저축은행 비중은 10% 안팎인데 아직 관리 가능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다만 대포통장이 제2금융권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는 만큼 순차적으로 관리감독을 강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조연행 금융소비자연맹 상임대표는 “저축은행에서 대포통장 피해사례가 미미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하지만 저축은행이 대포통장 논란에서 자유로울수 없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통장개설) 관리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1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