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생활 곳곳에서 사용되는 동전의 종말이 예고됐다. 동전만이 아니다. 한국은행의 지급결제 비전 2020은 ‘동전 없는 사회’에서 궁극적으로 ‘현금 없는 사회’를 지향한다. 동전, 즉 실물화폐 없이 살아가는 사회가 성큼 다가올 것이란 얘기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동전으로 불리는 1원은 5원, 10원과 함께 1966년 발행됐다. 사용이 저조한 1원과 5원은 1992년 발행이 중단됐고 지금은 10원, 50원, 100원, 500원의 동전이 시중에 유통 중이다. 한은의 비전대로라면 10원을 포함한 나머지 동전은 4년 후 자취를 감춘다.
동전을 비롯한 현금이 없는 사회가 내포하는 의미는 무궁무진하다. 현금이 사라지면 전자금융 위주로 지급결제가 이뤄지고 화폐개혁, 중앙은행의 금리결정 조절능력 약화 등의 가능성이 예상된다. 수많은 이슈를 담은 ‘지급결제 비전 2020’을 집중 분석했다.
/사진=이미지투데이
◆한은, 워킹그룹·이해기관협의체 구축
한국은행은 동전 없는 사회의 결제방식으로 충전식 선불카드 등의 활용을 검토하고 있다. 거스름돈을 동전으로 받지 않고 가상계좌와 연계된 선불카드에 입금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편의점에서 소비자가 현금 1만원으로 9500원의 상품을 구매하면 거스름돈 500원을 그의 선불카드에 충전해준다.
또 스마트폰을 활용해 거스름돈을 모바일뱅킹에 직접 이체하거나 모바일카드에 충전하는 방식도 검토 중이다. 은행 모바일뱅킹에 거스름돈을 직접 이체하는 것은 금융결제원과 추후 협의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김정혁 한은 전자금융팀장은 “거스름돈을 동전으로 받지 않고 직불·선불카드에 충전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며 “관련 기관들과 운영방안이 유효한지, 구현이 가능한지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은은 이달 안으로 금융결제원, 은행, 카드사, 밴사(결제대행업체) 등과 워킹(실무)그룹을 만들고 선불카드 사용과 현금영수증 축소화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운영체제 수립에 나선다. 아울러 유관기관과 공동정책세미나, 지급결제 외부전문가 토론회, 지급결제제도 발전전략 세미나 등을 마련해 새로운 지급결제의 정책방안을 제시할 방침이다.
◆상징성 담은 결제수단, 고객 편의 중심으로
한은의 지급결제 비전 2020은 현금의 소멸을 넘어 지급결제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동전과 화폐는 우리나라를 상징하며 주요 지급결제수단으로 쓰였다. 동전은 인물·동물·식물 등의 도안으로 우리나라의 우수성과 고유문화를 표현했다. 500원은 1982년 경제규모와 물가가 상승하면서 고액 동전의 수요가 높아짐에 따라 지폐가 동전으로 바뀐 경우다. 500원 동전의 비상하는 학은 제2의 경제도약을 상징한다. 과거 1973년에는 이순신 장군이, 1965년에는 세종대왕이 500원 지폐의 모델이었다.
화폐 속의 인물은 나라를 대표하는 무언의 외교관이라 할 수 있다. 화폐는 사람들 손에서 자유롭게 유통되며 인물의 우수성을 국내외에 널리 알린다. 1000원, 5000원 지폐는 조선시대의 문신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자리하고 1만원은 한글 창제의 찬란한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이 차지했다. 5만원권의 신사임당은 자녀의 재능을 살린 교육적 성취를 통해 교육과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최근 지급결제수단인 전자금융은 고객의 편의를 높이는 것이 포인트다. 실제 빠르고 쉬운 이용으로 고객의 전자화폐, 신용카드, 체크카드 등의 사용이 꾸준히 늘었다.
한은에 따르면 지난해 말 비현금 지급수단의 결제금액이 하루 평균 347조8000억원에 달한다. 신용·체크카드의 이용실적은 1조8800억원으로 2014년에 비해 8.8% 증가한 반면 어음, 수표의 실적은 22조8000억원으로 6.5% 줄었다. 가장 많이 사용한 지급수단은 신용카드(39.7%)였고 현금(36.0%)과 체크·직불카드(14.1%)가 뒤를 이었다.
사실 현금 없는 사회는 현금을 발행하는 한은이 직접 현금을 줄이고 비현금 지급결제를 확대하는 모순적인 행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은으로선 다른 기관에 전자화폐 업무를 맡겨 중앙은행의 역할을 뺏기는 것보다 현금발행이 줄어드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종렬 한국은행 결제정책팀장은 “한은은 지급결제 발전제도를 촉진하는 중앙은행으로서 현금 없는 사회를 연구하고 관련 정책을 적극 지원할 것”이라며 “새로운 지급결제수단이 원활히 운용되도록 시스템과 제도를 개선하고 정책사안을 대외에 공표하겠다”고 말했다.
◆동전 발행 축소, 리디노미네이션 가능
동전 퇴출의 가장 큰 목적은 비용절감이다. 동전이 액면가보다 제조비용이 비싸기 때문에 아예 발행규모를 줄여 수익개선에 나선다는 것. 한은은 동전 발행규모를 점차 줄여왔다. 2005년 1377억9500만원이던 동전 발행규모가 2015년에는 1031억6000만원으로 감소했다. 가장 큰 폭으로 발행이 줄어든 것은 500원짜리다. 2005년 발행규모가 885억900만원에서 2012년에는 381억1700만원으로 절반 이상 감소했다.
과거에는 10원짜리 동전(구리 65%, 아연 35%) 1개를 만드는 데 40원이 소요됐다. 2006년에는 아연 대신 알루미늄을 사용하면서 10원의 제조비용이 절감됐으나 여전히 구형 10원 동전은 1개당 30원, 신형 동전은 20원가량 소요된다.
일각에선 현금발행이 줄고 거래단위가 간소화되면 자연스럽게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이 올 것으로 관측한다.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의 실질가치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액면단위만 낮추는 일종의 화폐개혁이다. 가령 1000원 지폐의 액면단위를 1로 낮추면 1만원은 10으로 바뀐다.
이미 일상에선 자생적인 리디노미네이션이 일어났다. 현금에 ‘0’이 너무 많이 붙어 가격표시가 번거로워지자 카페 등에서 3500원짜리 커피를 ‘3.5’, 5500원짜리 샌드위치를 ‘5.5’로 표기하는 식이다.
김광명 발권국 기획팀장은 “현금발행을 감축한다고 해서 시장의 유동성이 줄고 통화정책 효과를 떨어뜨린다고 보기 어렵다”며 “현금 없는 사회는 전문적인 보안책이 필요하기 때문에 영향과 추후 가능성을 운운하기보다 시간을 갖고 현안을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2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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