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청탁 및 금품 수수 금지법'(김영란법)이 시행되면 고급스런 포장과 함께 손바닥만한 크기의 한우선물세트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고급 한우선물세트의 경우 가격대가 천차만별이지만 보통 10만원대부터 가격이 시작된다. 하지만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수십만원대에 이르는 한우세트는 그 양과 종류가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유통가에서는 이러다 한우와 스팸, 참치, 치약이 혼합된 퓨전 선물세트가 등장하는 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오는 9월28일부터 시행되는 김영란법 여파로 선물세트 시장이 들썩이고 있다. 김영란법은 언론인과 사립학교 교직원을 포함해 공직자가 직무와 관련 있는 사람에게 3만원을 넘는 음식 대접, 5만원이 넘는 선물, 10만원이 넘는 경조사비를 받으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 부담없는 가격이라는 5만원. 지금 대한민국 유통가는 5만원 이하 선물세트 구성에 여념이 없다. 기업들은 당장 코앞에 다가온 추석선물을 어떤 기준을 두고 마련할지가 고민이다. 올 추석은 9월15일로 김영란법 적용을 받지 않지만 예전처럼 선물공세를 펼 수는 없는 분위기다. 국민들의 시선이 이번 추석에 쏠려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한국농축산연합회 황태수 사무총장이 한우 5만원 세트 실물을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뉴시스 DB

◆추석 ‘선물 수요’ 가늠자
김영란법으로 인한 타격은 저가 상품군이 많은 대형마트보다 고가 상품군 위주인 백화점이 더 클 것으로 보인다. 롯데백화점에 따르면 지난해 추석 선물세트 매출 중 5만원 이하 제품 비중은 15%에 불과했다. 85%가 5만원 이상 제품이라는 뜻이다. 당장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매출유지를 위해 85% 중 상당비율의 제품을 5만원 이하로 맞춰야 하는 상황이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김영란법 시행 이후 약 20% 정도 매출감소를 각오하고 있다"면서 "10만원대 이하 선물세트는 비교적 티가 나지 않는 선에서 상품구성을 통해 5만원 이하로 맞출 순 있어도 원체 고가로 책정된 선물세트는 사실상 가격맞추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고급 위스키시장도 소비위축이 우려된다. 고급 양주는 선물시장에서 특히 선호되는 제품 중 하나다. 유명 양주선물은 비싼 가격이면서도 품위와 정성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어 고위층 선물로 인기가 높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급양주들이 5만원 이상이라 타격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양주의 경우 대형마트나 백화점처럼 상품구성을 통해 5만원으로 가격을 맞추기도 쉽지 않다.

고급 위스키 전문업체 디아지오코리아 관계자는 "아직 김영란법과 관련돼 구체적인 대안이 나온 것은 없다"면서 "매출에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페르노리카 역시 "아직 구체적 대안은 없다"며 "추석이 지나고 논의할 사안"이라고 말을 아꼈다.


홍삼선물도 김영란법 여파 범위 안에 있다. 한국인삼공사 관계자는 "일단 추석이 지나고 선물용 수요가 얼마인지 통계자료가 나오면 이후 구체적인 대안을 논의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유통업계는 이번 추석시즌을 활용, 선물시장 수요를 가늠해 추후 대응책을 내놓겠다는 방침이다. 이번 추석은 김영란법 시행 전이지만 시장 선물수요를 체크하기 안성맞춤인 시기이기 때문이다.

백화점업계는 일제히 추석 선물 예약코너를 개설했다. 법 시행과 관련돼 소비자의 반응을 먼저 살피기 위해서다.

부산 신세계 센텀시티는 4일 지하 1층 식품관에 추석 선물세트 사전예약 코너를 열었으며, 롯데백화점 부산지역 4개점도 지난 2일부터 선물 예약창구를 개설했다. 두 백화점 모두 예약 가능 상품군에 5만원 이하 저가형 실속 선물 세트를 대거 늘려 소비자 반응을 살핀다.

롯데백화점 대구점도 5만원 이하 선물세트 물량을 예년보다 30% 늘렸다. 특히 통조림, 햄 등 가공식품과 치약, 샴푸 등 생필품 선물세트 10개 품목에 대해 10억원어치 물량을 확보했다. 또 와인, 건강선물세트 물량을 늘리고 구성품 개수를 기존보다 줄인 과일세트를 새롭게 선보일 예정이다.


/사진=뉴스1 DB

◆한우·굴비·인삼 어쩌나
선물시장에서 가장 처리하기 곤란한 상황에 놓인 것은 한우, 인삼, 굴비 등 농·수·축산물이다. 워낙 고가로 책정되는 이들 상품군은 5만원에 맞추기가 상당히 어려운 편이다.

일부 차이가 있겠지만 대형마트에서 판매되는 수산물 선물세트 중 5만원 이하의 상품은 멸치, 오징어 정도다. 굴비에서부터 고등어, 갈치, 심지어는 건어물까지 대부분 5만원을 훌쩍 넘는다.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수산물은 건멸치나 건새우, 오징어만이 5만원 상품군으로 들어온다. 법 시행에 대비해 해양수산부는 5만원 이하의 소포장 수산상품 개발을 추진하기로 했다. 하지만 당장 생소한 소포장 수산세트가 선물용으로 얼마나 소비될지는 미지수다.

농림축산식품부는 김영란법과 관련, 이미 태스크포스(TF)까지 구성해 지난 2일 1차 회의를 개최하기도 했다.

농식품부가 이처럼 강한 반발을 보이는 이유는 김영란법 시행으로 농축산업 분야 피해가 가장 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농식품부는 김영란법 시행으로 농축산업계가 연간 최대 2조5000억원의 피해를 볼 것으로 예상했다.

농식품부는 현재 5만원으로 한정된 선물가격을 10만원으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고가 선물세트로 분류되는 한우나 인삼 등은 별도 기준을 적용하고, 10만원 이내 경조 화환 등은 경조사비에 포함해선 안된다는 의견을 법제처에 제시한 상태다.

김경규 농식품부 TF 식품산업정책실장은 "무작정 법을 만들어 따르라고 하기보다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금액 기준을 높여 시행하고 연차적으로 금액을 하향조정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면서 "최근 농업 개방이 심화하면서 정부와 농업인들이 우리 농축산물의 품질 고급화 전략에 나서고 있음을 감안하면 이번 김영란법 시행은 아쉬운 행보"라고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4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