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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 지급 여부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엇갈리면서 보험업계가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을 지급할 필요가 없다’는 교보생명 대법원 판결을 뒤집을 만한 판결이 나왔기 때문이다.
정치권은 소멸시효 효력을 없애는 법안을 발의하겠다며 엄포를 놓고 금융감독원은 대법원 판결과 관계없이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도 지급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생명보험사들은 각기 다른 잣대에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계산기를 두드리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을 끌수록 가장 답답한 쪽은 유가족이다. 유가족들이 현실적으로 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고 3라운드로 치닫는 자살보험금 관련 쟁점을 짚어봤다. 


◆엇갈린 대법 판결… 금감원∙정치권, 보험금 지급 압박

지난 13일 대법원은 알리안츠생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A씨의 유족을 상대로 낸 채무부존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 사건을 수원지법으로 돌려보냈다. 다만 이날 알리안츠생명 대법원의 판결에는 자살보험금의 최대쟁점인 소멸시효에 대해서는 따로 심리하지 않았다. 이에 알리안츠생명이 소멸시효를 근거로 항변할 경우 대법원의 판결이 달라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알리안츠생명 측은 “알리안츠생명이 제기한 채무부존재소송 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지난 5월 ‘자살도 재해사망으로 보험금 지급 대상’이라는 대법원 판결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일 뿐 소멸시효가 지난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라고 판시한 것이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이어 “앞으로 파기환송심에서 대법원 판결취지에 따라 심리할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소멸시효 완성여부 등에 대한 판단도 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번 판결은 소멸시효를 다루기 이전에 보험사 약관상 자살면책제한조항이 잘못된 표시라고 판단한 것을 다시 심리하라는 취지로 해석된다. 이에 따라 법조계에서도 자살보험금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될 전망이다.

금감원은 이 같은 대법원의 판결과 관계없이 소멸시효가 완성된 자살보험금도 지급해야 한다고 보험사를 압박하고 있다.

진웅섭 원장은 지난 13일 국회 정무위원회의 금융감독원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대법원이 판결을 내린 만큼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 지급 여부는 이제 생명보험사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사항”이라며 “하지만 생명보험사가 약관을 통해 소비자와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 원장은 “자살보험금을 미지급한 생명보험사는 양형기준에 따라 엄정히 행정 제제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법부의 판단은 존중하지만 행정은 별개라는 입장이다.

최근에는 신협협동조합중앙회에 자살보험금 미지급을 사유로 ‘자율처리’ 제재를 가했다. 이는 금감원이 자살 재해사망보험금 미지급 보험사를 제재하겠다고 경고한 후 나온 첫 사례다. 신협 외에도 금감원은 자살보험금 미지급 보험사에 대한 제재절차를 진행 중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금감원과 날선 각을 세우고 있는 삼성·교보·한화생명 등 대형생보사에 대한 현장 검사를 면밀히 진행한 것으로 파악됐다. 현장검사에선 그동안 지급하지 않은 자살보험금 규모와 자살보험금 미지급 결정 관련 최고경영자(CEO) 보고과정 등을 중점적으로 들여다본 것으로 알려졌다. 최종 제재 수위는 제재심의위원회를 거쳐 금융위원회가 결정한다.

일각에서는 금감원이 시간을 끌며 지금까지 자살보험금 지급을 미뤄온 보험사 경영진에 문책성 조치를 내릴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경영진에 대한 제재로는 면직, 해임권고 등이 있다.

정치권도 자살보험금 이슈에 가세했다. 김선동 새누리당 의원은 금융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소멸시효 특례법 발의 계획을 밝혔다. 앞서 지난 7월 주승용 국민의당 의원도 자살보험금 소멸시효 효력을 없애는 법안을 발의했다. ‘배임죄’ 소지를 원천차단함으로써 생보사들이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도 문제없이 지급할 수 있도록 물꼬를 트겠다는 취지에서다. 

◆눈치 보는 보험사… 복잡해진 셈법

이처럼 자살보험금을 두고 법조계 및 정치권, 금융당국 등이 각기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가운데 보험사들은 눈치만 보는 상황이다. 교보생명이 진행한 대법원 판결로 소멸시효가 지난 계약건에 대해서는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명분을 얻었지만 여론의 눈치를 안볼 수 없어서다.

그렇다고 이미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을 지급하자니 배임이나 이사의 선관의무 위반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소멸시효가 지난 보험금을 지불했을 경우 이와 유사한 건이 발생했을 때 끝없는 민원과 소송에 휘말릴 수도 있다. 소멸시효를 빌미로 자살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은 생보사뿐 아니라 소멸시효가 지난 보험금까지 지급키로 한 생보사도 좌불안석이다.

생보사 한 관계자는 “금융당국 지침에 따라 소멸시효가 지난 보험금도 지급하고 있지만 배임 관련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해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현재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까지 돌려주기로 한 보험사는 ING생명, 신한생명, 하나생명, DGB생명, 메트라이프생명, 흥국생명, PCA생명, 동부생명 등 8개사다. 반면 소멸시효 2년이 지난 계약에 대해 자살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은 곳은 삼성생명, 교보생명, 한화생명, 알리안츠생명, KDB생명, 현대라이프생명 등 6개사다. 

◆시간 끌수록 답답한 유가족… “소송 빌미로 2~3년 더 끌 것”

관건은 유가족이 재해사망보험금을 받을 수 있느냐다. 법조계는 소멸시효가 지나지 않은 계약의 경우 보험금을 청구하면 받을 수 있다고 본다. 반면 소멸시효가 지난 건은 소송이 진행 중이라는 점을 들어 보험금 지급을 미룰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법무법인 한 관계자는 “지금까지 대부분의 보험사들이 대법원 판결을 이유로 유가족에게 보험금 지급을 미뤄왔다”며 “여론에 떠밀려 소멸시효가 지난 건까지 보험금을 지급하겠다고 밝히더라도 현실은 유가족이 이를 알고 직접 보험사에 보험금을 청구하지 않는 한 보험사가 먼저 지급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험사들이 소송전으로 시간을 벌어 지급액을 줄이는 전략을 펼 것이라는 예상이다. 사실 개인 가입자가 시간을 써가며 거액의 변호사 수임료까지 지출하기란 쉽지 않다.

실제 대부분의 생명보험사들은 소비자가 공동으로 자살보험금 청구소송을 낸 건에 대해 항소와 상고를 거듭하며 시간을 끌어왔다. 알리안츠생명 소송 건 역시 유가족이 소멸시효가 만료되기 전에 재해사망보험금을 요청했으나 보험사 측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지금까지 소송을 끌고 온 것으로 파악됐다. 2014년 유가족이 보험금을 다시 청구했으나 이때는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 관계자는 “금감원에서 보험사를 강하게 압박하지만 사실 행정제재는 법적효력이 없다”며 “보험사가 고의로 (자살)보험금을 주지 않더라도 법적으로 문제 삼기가 힘들어질 수 있다”고 전했다.

금융소비자연맹은 소멸시효가 지나더라도 보험사의 손해배상책임 부분을 근거로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금융소비자연맹 관계자는 “소멸시효 문제를 떠나 재해사망보험금 여부 자체를 알지 못하는 유가족이 많은데다 알더라도 보험금을 받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면서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는 것은 생보사 스스로 쓴 약관의 손해배상 책임을 저버린 것과 같다”고 꼬집었다.

생보사 약관에는 ‘회사는 계약과 관련해 임직원, 보험설계사 및 대리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인해 계약자, 피보험자 및 보험수익자에게 발생된 손해에 대해 관계 법률 등에 따라 손해배상의 책임을 진다’고 명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