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현안 수북… '투트랙 행보' 부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연루 의혹으로 곤욕을 치르는 삼성그룹이 최악의 상황을 모면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뇌물공여·횡령·위증 혐의 등으로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법원이 기각했기 때문이다. 창사 79년 만에 처음으로 총수가 구속되는 ‘리더십 공백’ 위기를 피한 삼성은 이 부회장이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 및 재판을 받게 되면서 멈춰섰던 경영시계를 다시 움직일 계기를 마련했다. 

구속영장이 기각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9일 오전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사진=뉴스1

◆사상초유 ‘총수 구속’ 면했지만…

서울중앙지방법원 조의연 영장전담부장판사는 지난 19일 오전 18시간 넘는 장고 끝에 “뇌물죄의 요건인 대가관계와 부정한 청탁 등에 대한 현재까지의 소명 정도, 각종 지원 경위에 관한 구체적 사실관계와 그 법률적 평가를 둘러싼 다툼의 여지, 관련자 조사를 포함해 현재까지 이뤄진 수사 내용과 진행 경과 등에 비춰볼 때 현 단계에서 구속 사유, 필요성,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이 부회장에 대한 영장을 기각했다.
사상 초유의 ‘총수 구속’이란 최악의 상황을 피한 삼성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구속영장 기각이 이 부회장의 무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어서 아직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앞으로 이 부회장은 그룹의 2인자인 최지성 미래전략실장(부회장), 장충기 미래전략실 차장(사장) 등 그룹 수뇌부와 함께 특검의 수사와 재판을 받아야 한다.


이런 상황을 감안해 삼성 측은 공식적으로 “이재용 부회장이 불구속 상태에서 진실을 가릴 수 있게 돼 다행으로 생각한다”며 말을 아꼈다.

실제 특검팀 이규철 특검보는 브리핑을 통해 “특검과 법원의 견해차이가 있다”며 “법원의 결정은 매우 유감이나 필요한 조치를 강구해 흔들림 없이 수사를 진행할 예정”이라며 앞으로도 고강도 수사를 이어갈 방침을 밝혔다.

당초 삼성에 대한 수사의 종착지가 박근혜 대통령의 뇌물혐의 규명에 있었던 만큼 이 부회장과 그룹 수뇌부에 대한 재소환과 추가 압수수색 가능성도 열려있다. 


특검팀은 이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를 위해 2015년 단행한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공단의 찬성을 얻는 대가로 비선실세 최순실씨 일가에 430억원가량의 뇌물을 주기로 하고 실제로 250억원가량을 건넨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총수가 구속 수사를 받는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아직 수사가 끝나지 않은 만큼 당장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며 “특검팀의 수사상황을 지켜보며 밀린 경영현안을 하나씩 풀어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국내 1위 기업이자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기업인 삼성은 지난해 11월부터 검찰 압수수색에 이은 수뇌부 소환조사,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 특검 수사 등을 줄줄이 받으며 두달가량 경영시계가 멈췄다.

새해 경영계획을 확정하기 위한 선제 조건인 사장·임원 정기인사와 조직개편이 무기한 연기됐으며 최고경영자(CEO) 세미나도 열지 못했다. 차질을 빚는 대형투자 건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대응을 못하고 있다.

삼성은 지난해 11월 미국 자동차 전장 부품기업 하만을 약 9조3600억원에 인수, 단숨에 글로벌시장 선도 기업으로 부상하겠다는 포부를 밝혔지만 일부 하만 주주들이 매각에 반대해 난항을 겪고 있다.

지금까지는 검찰 수사 등으로 제대로 대응을 못했지만 이번 인수를 주도한 이 부회장이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재판을 받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 하만 주주 설득 작업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오는 4월 전세계에 출시할 예정인 삼성전자 스마트폰 갤럭시S8에 대한 철저한 품질검증도 시급한 현안이다. 지난해 하반기 갤럭시노트7 실패로 실추된 브랜드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선 신제품은 최고의 성능은 기본, 안정성이 완벽히 보장돼야만 한다.  

하지만 인사와 조직개편 작업이 무기한 연기되면서 갤럭시S8의 품질검증 개선안 마련도 늦춰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태가 주요 외신을 통해 전세계에 알려지며 추락한 삼성의 신인도 회복도 시급한 과제다. 일각에선 7조원가량의 손실을 안긴 갤럭시노트7 사태보다 이번 게이트 연루가 대내외적으로 삼성에 더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고 평가한다.

이에 삼성은 특검팀 수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미뤄뒀던 사장·임원 인사와 조직개편부터 단행할 것으로 보인다. 인사와 조직개편이 마무리돼야 계열사별로 수립했던 2017 경영전략을 확정하고 새해 경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어서다.
 
서울 삼성 서초사옥. /사진=뉴스1

◆인사·조직개편 등 순차 진행

삼성전자가 지난해 11월 말 예고한 지배구조개편, 주주환원 확대 방안에 대한 논의도 이뤄질 전망이다. 또 이 부회장이 주도했던 M&A를 통한 미래성장동력 확보 행보도 재개될 수 있다.
재계 안팎에선 이 부회장이 앞으로 전개될 사법일정과 별도로 자체 쇄신안을 마련할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정경유착의 검은 고리를 끊는 방안과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할 새로운 경영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

이와 관련 이 부회장이 직접 미래전략실 해체를 언급한 만큼 새로운 형태의 그룹 컨트롤타워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경영쇄신 작업도 동시에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이런 준비에 시간이 필요한 만큼 단기적으로 사장단협의체가 그룹을 경영하는 과도기적 체제가 도입될 가능성이 거론된다.

앞서 삼성은 2008년 비자금 의혹에 따른 삼성 특검으로 이건희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 전문경영인으로 구성된 사장단협의체를 그룹 컨트롤타워로 운영한 바 있다.

재계 관계자는 “아직 수사와 재판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부회장이 직접적인 글로벌 경영활동을 하기는 어렵겠지만 총수의 권한인 대규모 투자 등을 결정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이라며 “특검 수사와 재판에 대비하면서 밀린 경영현안도 챙겨나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