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임한별 기자

최근 첨단기술의 홍수를 거슬러 투박한 옛 모습 '레트로'가 떠오른다. 레트로 열풍은 패션과 가전제품의 디자인 영역을 넘어 생활 전반에 빠르게 파고든다. 레트로 상품은 겉만 복고풍이고 속은 최첨으로 채워 또 하나의 경제적 가치를 실어나른다. <머니S>가 최근 마케팅의 키워드로 떠오르는 레트로 열풍을 추적했다. 레트로 열풍의 원인을 분석하고 복고에 열광하는 이들의 일상을 살펴본다. (편집자)
유행은 돌고 돈다. 촌스럽다고 손가락질 받던 패션이 핫 트렌드로 부활하고 미니멀패턴을 추구하던 가구도 화려한 옛 모습으로 재탄생한다. 이 같은 현상은 특히 IT기기를 비롯한 각종 전자제품에서 두드러진다. 아날로그 감성이 물씬 느껴지는 음향기기부터 카메라, TV, 냉장고, 게임기에 이르기까지 ‘첨단’이라는 외적 이미지를 벗어던진 제품이 소비자에게 큰 호응을 얻는다.

가격비교 사이트 에누리가격비교에 따르면 올 초 레트로 전자제품의 매출은 지난해에 비해 주문 수와 수량, 총매출이 모두 상승했다. 에누리가격비교 측은 “1980~1990년대 인기를 끌던 오락실게임을 탑재한 고전게임기 매출은 전년 대비 436%나 급증했고 아날로그 디자인의 오디오 매출도 2016년보다 21% 상승했다”고 밝혔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레트로 인테리어와 어울리는 빈티지 소품을 찾는 이가 많아지면서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제품을 찾는 경우도 늘고 있다”며 최근 불고 있는 레트로 열풍을 설명했다.

◆가전제품 차별화 키워드 ‘레트로’

레트로 제품은 소형가전을 중심으로 출시되는 경향을 보인다. 레트로 소형 가전은 반짝이는 광채, 동글동글한 곡선, 혹은 묵직한 직선을 강조한 윤곽선에 1960년대 전세계에 큰 반향을 불러왔던 팝아트가 연상되는 화려하고 파격적인 색채가 특징이다.


현재 국내 레트로 가전시장에서 가장 인기있는 브랜드는 스메그, 대우전자, 코스텔 등이다. 삼성전자, LG전자의 첨단제품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다소 낯선 이 업체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유명세를 떨친다. 이름 좀 알려진 카페나 펜션 등에는 이들 브랜드의 냉장고가 꼭 한대씩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특히 스메그의 경우 레트로 제품시장에 집중한 덕분에 지난해 국내시장 소형가전 매출을 전년 대비 50% 넘게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스메그 측은 “세계적으로 최고 기술력을 자랑하는 국내 가전업체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포인트는 디자인이라고 봤다”며 “백색가전에 지루함을 느낀 고객층을 공략하는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사진제공=스메그코리아

카메라, 음향기기 등 취미와 관련된 전자제품에서도 레트로 열풍이 감지된다. 이들 제품의 경우 최신 기능에 클래식한 디자인을 결합한 것이 특징이다. 최신기능을 갖췄지만 사용법은 간단하다. 레트로 스피커의 대명사로 꼽히는 마샬 스탠모어 블루투스 스피커의 경우 전원을 켜고 버튼 하나만 누르면 즉시 페어링이 가능하다. 기능에 이상이 없으면 5초 내외로 페어링을 완료할 수 있다.
음향기기 마니아 A씨(73·남)는 “과거에는 마음에 드는 제품을 구하기 위해 발품을 팔아야 했는데 최근 복고(레트로) 제품이 쏟아지면서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며 “최신기능을 갖췄지만 사용법이 간단해서 좋고 클래식한 디자인을 보면 젊은 시절을 추억할 수 있어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8090 오락실 감성에 마니아 열광

게임 마니아들도 최근 레트로 바람에 푹 빠졌다. 고전 게임을 전문으로 하는 인터넷방송이 큰 인기를 끄는가 하면 30만원대의 1980~1990년대 오락실 게임기를 집으로 들여놓는 이도 심심찮게 찾을 수 있다.

게임 전문기업 닌텐도는 1983년 출시된 8비트 게임기 ‘패밀리 컴퓨터’를 소형화한 ‘패미컴 미니’를 출시했다. 이 제품은 아마존에서 순식간에 완판됐다. 곧이어 중고거래 장터에서 2배가 넘는 웃돈이 붙어 거래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출시된 슈퍼패미컴 미니의 복각판은 출시 한달이 채 지나지 않아 전세계에서 200만대 이상 팔렸다.

국내에서 가장 인기있는 레트로 게임기는 1000가지 이상의 게임을 탑재한 가정용 레트로 게임기 '월광보합시리즈'다. 시중 온라인 쇼핑몰에서 10만원대에 판매 중인 이 제품은 스트리트파이터, 더킹오브파이터 등 인기 대전격투 게임은 물론 모험도, 콘트라 등 횡스크롤 게임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최근 게임기업 SNK가 월광보합 게임기에 대해 판매금지신청을 내는 등 시장상황이 급변했다. 이에 일부 레트로 게임 마니아는 ‘라즈베리파이’라는 초소형 컴퓨터 DIY 키트를 활용해 직접 게임기를 만들기도 한다.

/사진제공=각 사

◆레트로 전자제품 인기 비결은
레트로 현상이 전자제품시장을 관통하는 트렌드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소비자심리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레트로 제품이 지닌 이미지 덕분이라고 풀이한다.

한 전문가는 “레트로 제품은 쉽게 구하기 어렵다는 희소성을 지닌다”며 “대부분의 레트로 제품이 고가임에도 소비자의 선택을 받는 원인은 이런 희소가치가 프리미엄급 이미지로 치환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현실의 고단함’도 원인으로 지목된다. 브랜드 컨설팅 업체 스톤브랜드커뮤니케이션은 보고서를 통해 “현실의 고단함은 다른 방향의 위안을 찾게 한다”며 “현실에서 이탈하고자 하는 마음이 레트로 제품 인기의 기저에 있다”고 분석했다.

전자제품업계는 레트로 열풍의 원인을 ‘신기술이 주는 피로’에서 찾는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새로운 기술에 적응하는 데 피로감을 느낀 사람들이 익숙하고 단순한 제품을 찾으면서 새로운 시장이 형성된 것”이라며 “신기술이 등장하는 한 레트로 열풍은 일시적인 현상에 그치지 않고 꾸준한 수요를 창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42호(2018년 5월30일~6월5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