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이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자유무역주의로 돌아가긴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사진=머니S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재집권하면서 세계 무역 패러다임은 또 한 번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자유무역협정(FTA)을 중심으로 확장됐던 과거의 국제 통상 질서는 점차 심화하는 자국 우선주의 기조 탓에 국지적 블록화로 재편되는 양상이다.

미국의 공급망 재편 시도는 바이든 행정부 시절부터 추진돼 왔지만 트럼프 정부는 보조금을 통한 유인책 대신 강력한 과세 장벽을 바탕으로 전 세계와 건곤일척의 통상 전쟁을 벌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이러한 방식은 경제 환경의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만큼 그 어느 때보다 국내 기업의 기민한 대응이 요구된다는 목소리가 높다.
트럼프의 관세 전쟁, 자유주의 무역 시대의 종말
김동한 법무법인 지평 고문(맨 왼쪽)이 지난 13일 여의도 신한투자증권 회의실에서 '트럼프 관세전쟁과 한국경제 생존전략'에 관한 의제들을 조율하고 있다. /사진=머니S
"현재 트럼프 행정부에서 벌이고 있는 관세를 통한 공급망 재편 시도는 바이든 행정부 시절부터 시작됐다. 미국이 오랫동안 추진하는 기조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단기간 내 끝날 것 같지 않다. 예전과 같이 자유무역 시대로 돌아가긴 힘들다고 본다."


지난 13일 머니S가 주최한 '트럼프 관세전쟁과 한국 경제 생존전략' 좌담회에서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차분하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만이 견지한 정책적 움직임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만큼 견고하고 미국 자국우선주의로 촉발된 보호무역의 시대는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2차세계대전 이후 자유무역은 글로벌 통상 환경이 견지해온 기본 질서였다. 그 중심에는 제국주의 시대를 종식하고 세계 최강국으로 떠오른 미국이 있었다. 자국 이익을 최우선하던 미국은 어느새 다자주의(여러 나라가 무역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세계 수준의 협의체를 두고 가치 체계나 규범, 절차 따위를 각국이 준수하고 조율하도록 한다는 태도)를 취하면서 자유무역주의를 주도하는 국가가 됐다. 이러한 다자주의는 오랜 세월 미국이 국제적인 무역 협상 회담에서 리더십을 발휘한 근간이었다.

관세를 낮춰 국경을 넘나드는 수입재는 값싸게 세계 시장을 오갔고 각국의 산업적 역량이 결합해 전 세계인들은 좋은 품질의 물건을 이전보다 저렴하게 소비할 수 있었다. 이는 한국이나 대만처럼 수출주도형 개도국의 등장 배경이기도 하다.


이 시기 자유무역협정(FTA)은 시대를 관통하는 견고한 흐름이었다. 이른바 경제동맹이라는 이름으로 허들 없는 무역 환경이 조성됐다. 여러 국가가 연합해 거대한 경제블록이 탄생하기도 했다. 국가 단위를 넘어 유럽연합(EU), 북미자유무역(NAFTA)처럼 일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FTA 영향력이 확대됐다.

전후 100년 가까이 지속된 다자주의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 조치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트럼피즘(트럼프주의) 2.0은 글로벌 자유 무역 기조의 종말을 앞당겼다는 것. 바이든 정부는 반도체와 친환경 에너지 분야에서 보조금 지급을 통해 공급망 질서를 자국 위주로 재편하려고 했다면 트럼프 행정부는 '고관세'라는 전통적 방식으로 동맹국과 적대국을 가리지 않고 압박 중이다.
무자비한 트럼프 관세 정책, 효과 제한적… 추이 살피며 대응 방안 마련해야
오건영 신한프리미어 패스파인더 단장은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협상이 난항을 겪을 수 있다고 봤다. /사진=머니S
하지만 강경한 관세 압박도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기세에 눌려 전향적으로 협상에 나섰던 국가들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탓이다. 김학균 센터장은 "한국은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인 까닭에 관세 협상이 늦었다는 조급함이 있었는데 오히려 서둘러 미국과 대화에 나선 일본이나 베트남 등에서도 이렇다 할 효과가 없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학습 효과로 이제는 미국에 끌려다니지 않는 기류가 엿보인다. 최근에 미국과 영국의 합의는 상황이 좀 다르다고 봤다.

오건영 신한프리미어 패스파인더 단장은 "일본과 얘기하다가 잘 되지 않을 것 같으니 영국과 관세 협상을 진행했다"며 "영국은 대미 무역 적자국이다보니 한국이나 일본 등 대미 무역 흑자국보다 마찰이 적다"고 했다. 대미 무역 적자임에도 관세 폭탄을 맞은 영국은 상대적으로 협상이 수월했다는 설명이다.

기타 국가들은 여전히 관세 협상이 진행 중인데 '시간'은 미국의 편이 아니라고 봤다. 내년 11월 미국 중간선거라는 대형 정치 이벤트를 앞두고 있어 후반기 집권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관세 분쟁이 장기화되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에겐 치명적이라는 설명이다.

오건영 단장은 "트럼프 행정부 입장에서는 협상이 잘 안 되면 안 될수록 급해질 것 같다"며 "왜냐하면 185개국을 상대로 관세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협상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다급해질 것"이라고 봤다. "모든 협상은 급한 사람이 지게 돼 있다"고 덧붙였다.

많은 국가들이 지연 전략을 통해 협상력을 높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경우, 과거처럼 선제적으로 협상에 나서기보다는 미국 내 정치적 상황과 글로벌 통상 환경의 변화에 발맞춘 '기민한 대응 전략'이 요구된다.

오 단장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100일이 지난 지금 집권 초기와 비교해보면 각국이 빠르게 협상을 하는 것보다 '천천히 가는 게 낫겠다'라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각 국가 협상 상황을 지켜보면서 실리를 최대한 취해야 한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오건영 단장은 "시간이 우리 편이면 천천히 기다리면서 기회를 찾아보는 것도 답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김학균 센터장도 "너무 급하게 관세 협상에 임하는 것보다는 다른 나라 상황을 보면서 신중하게 하는 게 낫다는 데 공감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