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에도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요? 100세 시대라는데 퇴직은 너무 빠른 것 같습니다." 최근 여의도 한 시중은행 영업점에서 만난 팀장이 조용히 말했다. 25년 넘게 영업점을 돌며 고객을 만나온 그는 내년 임금피크제 적용 대상이 된다.

요즘은 창구보다 모니터를 보는 시간이 휠씬 길어 AI 시대를 절감한다고 했다. 대출 상담도 계좌 개설도 이제는 챗봇이 대신한다. 일은 그대로인데 그 일을 하던 사람만 사라졌다.


은행권 조기 퇴직은 이제 일상이 됐다. 최근 개봉한 영화(어쩔수가 없다)처럼 디지털 혁신과 일자리 감소 위협은 공존한다. 올해도 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 등 5대 시중은행에서 2000명 규모 직원이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떠날 것으로 추산된다. 이제 실제 퇴직 연령은 은행들의 임금피크 적용 대상인 50세 중반이다.

임금피크 대신 퇴직을 선택하는 문화가 팽배하고 "대규모 퇴직 위로금을 챙겨주고 내보낸다"는 말이 공공연하다. 지난해 이후 위로금과 법정 퇴직금을 합치면 1인당 평균 6억~7억 원 수준. 은행은 비용을 줄였다고 말하지만 그 자리는 텅 빈다.

겉으론 경영 효율성을 위한 선택이다. AI 대전환(AX)과 비대면 채널 확대가 은행의 비용 구조를 바꿔놨다. 5대 시중은행의 신규 예금 중 모바일 등 비대면 가입 비중은 평균 80%를 훌쩍 넘는다. 은행들은 "대규모 영업점 축소와 자동화에 따른 비용 효율화의 길"이라는 입장이다.


은행의 숙련 인력이 대거 빠져나가며 고객 신뢰 하락도 우려된다. AI는 신속한 답을 주지만 고객의 감정과 불안까지 읽지 못한다. 거래는 남았지만 관계는 멀어졌다. 은행의 고객 신뢰를 지탱한 건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효율을 좇은 결정이 결국 신뢰의 비용으로 돌아오고 있다.

은행 창구의 베테랑은 고령층 고객의 상담 창구가 될수 있다. 지역에 정통하고 사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영업점 간부는 중소기업 자문역이 될수 있고 대출 심사역의 노하우는 금융 안전장치가 된다. 은행 퇴직 직원의 재고용은 예외가 아니라 제도로 자리 잡을 때 곧 경쟁력이 된다. 시니어 인력을 남겨야 신뢰가 남는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흐름이 한국 사회의 인력 구조와도 엇박자를 낸다는 점이다. 국내는 노동 인구가 줄고 인력난이 깊어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생산가능인구는 2019년보다 100만 명 이상 줄었고 한국은행은 2030년 이후 노동력 감소 폭이 지금의 두 배로 커질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은행은 숙련 인력을 스스로 내보내고 있다. 조기 퇴직은 단기 비용 절감엔 도움이 되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쟁력 약화와 신뢰 하락으로 이어진다. 일본은 이미 다른 길을 택했다. 2006년 65세 고용 확보 조치에 이어 2021년에는 70세 취업 기회 확보법을 시행했다. 60세 정년 후에도 숙련 인력이 재고용을 통해 일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일본 최대 미쓰비시UFJ은행은 시니어 재고용 인력을 400여 명이나 운용하고 2030년엔 전체의 10%까지 늘릴 계획이다. 리소나그룹은 정년을 65세까지 선택할 수 있고 미즈호금융그룹은 55세 이후 임금 일괄 삭감을 없앴다. 경험을 비용이 아닌 자산으로 본 결과다.

우리 정부도 제도적 길을 열어야 한다. 계속고용 표준계약과 인사·노무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관련 세제와 보험 지원으로 기업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 기업 시니어 인력의 경험이 역할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이뤄져야 한다. AI가 효율을 바꿨다면 사람은 신뢰를 지킨다. 퇴직은 끝이 아니라 금융의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다.
송정훈 시장경제부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