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수많은 대기업들이 넘어지면서 망하는 부자(정확히는 재벌)가 쏟아졌다. 그들 중 두 부자의 사례다. 한명은 금융재벌 고려의 2세인 이창재 회장이고 또 다른 이는 삼성에서 분가해 위세를 떨쳤던 전 새한그룹의 이재관 부회장이다. 그들(또는 그들의 가문)은 재기했지만 실패했고, 또 다시 재기에 가까운 성공담이나 참담한 실패담을 쓰고 있다.



1997년으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 또 다시 외환위기에 필적하는 위기론이 부상하고 있다. 이창재 회장과 이재관 부회장, 두 사람의 사례를 통해 부자의 몰락과 재기, 실패, 좌절을 반추해 봤다.



◇고려그룹 일가, 무기수→재벌 총수→부실 기업인→재기(?)



한때는 명동과 충무로의 랜드마크이기도 했던 대연각빌딩에는 사연이 많다. 건물과 소유주 모두 그렇다.



장년층에게 대연각빌딩은 1971년 대화재로 기억된다. 그해 크리스마스에 대연각 호텔에서는 대형 화재가 났고 160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호텔 2층 커피숍에서 번지기 시작한 화마는 사나운 겨울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높이 80여m의 22층 건물 전체로 옮겨 붙었던 것. 이 화재는 헐리우드 영화 타워링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화마로 폐허가 된 대연각을 인수한 것은 고 이강학 회장(2006년 작고)이었다. 경찰 공무원이었던 그는 사업으로 길을 바꾼 지 7년 만에 대연각을 인수했다.



당초 그는 3.15 부정선거를 주도한 혐의로 사형 구형을 받아야 했던 신세였다. 4.19혁명 당시에는 치안총수기도 했던 그는 무기징역이 확정된 후 4년형을 살고 나온 후 동대문시장에서 포목장사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가 직접 부를 축적한 계기는 원양어업 사업이다. 1966년 해외산업이란 회사를 설립한 그는 한 척의 용선을 시작으로 세계 각국으로부터 참치를 잡아 일본으로 전량을 수출하면서 부를 축적해 1971년 서울 명동의 대연각 인수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재계 인사로 활동의 폭을 넓혀가며 1978년 대아증권(고려증권 전신)을 인수했고, 1983년에는 반도투금(고려종금 전신)을 설립했다. 또 동광약품과 명동 계양빌딩 등도 잇따라 인수했다. 아들인 이창재 회장도 70년대 중반부터 아버지의 사업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이 회장 부자의 몰락은 외환위기와 함께 찾아왔다. 1998년 고려종금과 고려증권, 고려생명 등 주축기업 3인방이 지급여력 부족으로 영업정지 명령을 받으면서 몰락했던 것. 또 다른 그룹내 계열사인 고려통상의 2007년 기준 감사보고서를 보면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고려통상의 장기투자증권 중에는 고려증권(426만여주)과 고려종금(154만여주) 등이 있지만 장부가는 1000원과 2000원으로 기재돼 있다.



2006년은 이들 부자에게는 굴곡진 한해였다. 재기를 모색하던 이강학 회장이 그해 5월 세상을 떠났던 것. 또 그해 11월에 이창재 회장은 국세청의 고액체납자 공개를 통해 불명예스런 300억원대의 국세 체납사실이 알려졌다. 이 회장이 타인에게 회사(고려통상) 주식을 넘기는 과정에서 증여세 등이 문제가 된 것. 또 다른 그룹내 계열사인 동광제약이 1998년 부도와 1999년 화의개시 등 부침을 거쳐 화의가 종료된 것도 2006년 4월이다.



이 회장의 체납세금은 몇 년간 계속 그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2년여 뒤인 현재 이 회장의 지인 등에 따르면 이 회장은 지난해 체금 세금을 대부분 해결한 것으로 알려진다. 무기수에서 대연각 인수로 화려한 부활을 선보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 대연각 빌딩이 부동산값 급등으로 가치가 오르며 이 회장의 재산을 다시 준재벌급으로 늘려준 것. 고려통상과 동광제약(회사간 상호 지분 출자)도 연결재무제표상으로 보면 2006년과 지난해 22억원과 26억원의 순익을 올렸다. 물론 최근 부동산 등 자산가치 하락은 이 회장과 고려그룹에 또 다른 위협 요인이 되고 있다.



◇삼성가 로열패밀리, 2대에 걸친 인생유전



이창재 회장의 사례처럼 이재관 부회장도 사연이 많다. 이재관 부회장은 본래 국내 최고의 재벌 삼성가의 일원이다. 그의 아버지는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둘째 아들인 고 이창희 새한그룹 회장이다.



이창희 회장은 삼성의 아킬레스건에 해당하는 일명 사카린 밀수사건(66년) 당시 아버지 대신에 실무자들과 함께 구속됐던 이력도 있다. 하지만 형(이맹희 씨)이 1971년 그룹에서 물러나고 동생인 이건희 회장이 후계자로 낙점되면서 이창희 회장은 삼성쪽에서 떨어져나가 독자적인 사업체를 일궜다. 새한미디어 등을 키우며 준재벌급으로 그룹을 키웠던 것.



이창희 회장은 1991년 혈액암으로 사망했다. 분가 과정에서 삼성쪽에서 제일합섬 등을 넘겨받은 것도 이창희 회장이 아닌 그의 미망인과 1991년 28세의 나이에 새한미디어 대표이사 사장에 선임됐던 이재관 부회장이었다. 해외 유학파(미국 보스턴 소재 터프스대(대학원)에서 학업)로 1980년대 말 씨티뱅크 서울지점에 근무하던 그는 아버지 사망과 함께 사업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경영수업을 제대로 받을 틈조차 없이 그룹 총수의 자리에 오른 것이 이재관 부회장에게는 오히려 불행이었다.



제일합섬의 그룹 편입 등을 계기로 대규모 투자에 착수한데다 사업전환과 구조조정에서 모두 한발 늦고 말았다. 또 외환위기 이후 경영 환경이 악화된 것도 고스란히 타격을 줬다. 그룹은 해체됐고 채권단 위주의 경영이 이어졌다. 당연히 경영권도 빼앗겼다.



2002년에는 분식회계를 통해 1000억여원을 불법대출받은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부회장 자신이 구속 수감되는 아픔도 겪었다. 1960년대 한때나마 영어의 몸이었던 아버지에 이은 이 부회장의 구속은 30여년을 사이에 둔 가족사의 비극이었다. 또 수사 무마 청탁 등을 위해 김홍업씨(김대중 전 대통령 2남) 등에게 수억원대의 돈을 건넨 사실도 밝혀졌다.



이 부회장은 보석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결국 집행유예형으로 유죄를 선고받으며 오랜 송사 등을 거쳤고 부실 기업인이라는 낙인이 찍히며 재기도 어려운 상황이 됐다. 장인의 회사인 물류기업 동방 주식(8만500주)을 갖고 있지만 시가로는 6억여원 안팎에 그친다.



하지만 그에게도 재기할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 지난 8월 광복절을 맞아 가까스로 특별복권될 수 있었던 것. 3개월여 동안 이 부회장은 사업 재개를 포함해 여러 가지를 구상 중이며 주변에서도 삼성, 신세계, CJ 등 범삼성가 기업에 부품이나 해외 제품 납품업 등을 하며 재기할 것을 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 부회장의 고모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 등이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챙겨왔던 사례도 있다. 이맹희씨(이재관 부회장 큰아버지)는 회고록에서 “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말을 못하고 있으면 늘 지갑을 열고 가지고 있던 돈을 쥐어준 것도 명희였다”고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창재, 이재관 두 사람의 사례는 경제개발기의 주역이자 영욕이 함께 내포된 대기업의 흥망성쇠와도 궤를 같이 한다. 그들의 몰락과 재기도 재벌가의 또 다른 이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