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의 반란, 그 이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또 남은 숙제는 무엇일까. 2013년 정치, 경제, 사회를 소위 '들었다 놓은' 갑을 갈등과 그 이후를 조명해봤다.
◆ '을'은 강해졌나
"'갑'의 달라진 태도는 1년 전과 비교해 하늘과 땅 차이라고도 볼 수 있죠."
한때 남양유업 피해대리점주 회장이었던 이창섭 씨의 말이다. 아직 회사 측과 보상금 합의 등 해결해야 할 여러 사안이 남아 있지만 향후 결과는 긍정적일 것으로 예상한다. 이씨를 비롯해 함께 회사를 상대로 투쟁했던 대리점주들은 영업권 회복을 앞두고 있다.
이씨는 현재 남양유업피해대리점협의회를 탈퇴하고 전국대리점협의회(가칭)의 공식 출범을 준비 중이다. 갑의 우월한 지위를 남용해 횡포를 부린 게 비단 남양유업뿐만은 아닐 터. 다른 업종에 종사하는 대리점들도 '갑'인 본사로부터 비슷한 피해를 당해왔다는 점에 착안해 범대리점주협의체를 만들겠다는 발상이다. 이미 수천개의 대리점이 지지를 보내온 상태다. 개별 대리점들 역시 올해 정점으로 치달은 갈등을 계기로 스스로가 권익을 보호하고 문제를 해결할 단체가 필요하다는 데 뜻을 같이 했다.
이번 갑을문제를 계기로 기업내 상생기구가 설치되고, 물량 밀어내기 등의 횡포를 자제하는 등 회사 스스로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 곳이 많다. 정치권에서도 남양유업방지법(대리점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에 대한 논의가 탄력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씨는 "지금까지 여론의 포화를 맞은 회사들 외에도 여전히 갑의 일방적인 횡포로 힘들어하는 을이 많다"며 "지금은 여론의 추이를 보며 몸을 사리는 것일 뿐 제도까지 바뀐 것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오명석 세븐일레븐바이더웨이가맹점주협의회장도 "가맹사업법이 통과됐기 때문에 본사와 가맹계약을 맺은 이들이 조금이나마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는 마련됐다"면서도 "여전히 회사 측은 개선의지가 없다. 정치권이 나서 가맹점협의회와 본사를 중재하고 있지만 이견이 커서 좁히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강조했다.
오 회장은 거액의 위약금 때문에 폐업조차 할 수 없는 문제나 가맹점의 각종 수익을 본사가 편취하는 등 고질적인 문제점은 여전하다고 말한다. 그는 "담배회사가 편의점에 광고판을 설치하며 광고비를 지불하지만 이에 대한 수익은 가맹점은 모른채 회사가 독식하고 있다"며 "이런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 뿐 본사가 가맹점에 공개하지 않는 기타 수익이 다양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방적으로 영업권을 강탈당한 아모레퍼시픽 특약점주들 역시 여전히 회사와 싸우고 있다. 서금성 피해특약점주협의회장은 "아모레퍼시픽 측이 국감장에서는 고개를 숙이는 듯 했지만 여전히 피해보상에 대한 합의가 요원하다"며 "회사측이 영업장을 빼앗고서는 현업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보상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 반짝 이슈 아닌 정책 실현의지 필요
각계 전문가들은 문제가 불거진 유통업계의 본사와 대리점 관계뿐만 아니라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하청관계에도 갑과 을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꼬집는다.
이병훈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갑을문제는 지난해 대선 때부터 화두인 경제민주화와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갑을문제는 우리사회에 경제민주화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드러낸 사건이었다"며 "일부 고질적인 문제들이 개선되는 효과가 있었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여전히 이뤄지지 못한 채 건드리다 만 상태로 남아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다시 표출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
전문가들은 시장경제의 미성숙이 현재의 갑을갈등을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미국, 영국 등 시장경제가 성숙한 국가들은 시장의 우위를 점한 사업자가 자신이 가진 지위를 이용, 불공정행위를 강요했을 때 고강도의 징벌조치를 취한다. 거래 자체가 공정하게 보호되는 만큼 약자에 대한 보호장치나 강자의 횡포에 따른 비용과 규범이 법제화돼 있는 것.
이 교수는 "시장경제가 성숙한 국가들은 과거에는 갑을문제가 있었을지 몰라도 정책이 잘 자리잡혀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문제를 찾아볼 수 없다"며 "우리의 경우 과도기 단계로 시장 관행이 개선되면 선진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일부의 대기업이 모든 것을 독식하고 횡포를 부리는 후진성을 거듭하게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렇다면 갑을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오세조 연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는 우선 갑과 을이 파트너십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우리나라 기업들은 외환위기와 금융위기 등을 거치면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관념 속에 외부와의 관계에서도 파트너십의 개념이 잘 잡혀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즉 상거래는 서로 '윈윈'하는 관계가 구축돼야 함에도 파트너십이 아닌 갑을관계로 고착화됐다는 것이다. 오 교수는 "갑과 을이 공동운명체로 갈 수 있는 토양이 필요하다"며 "패널티나 인센티브를 넘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바탕으로 한 조직문화로 바뀌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특히 정부도 새로운 정책과 제도개선에 골몰하기보다는 왜 시정이 안됐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고 이병훈 교수는 지적한다. 갑을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이미 불평등을 낳고 양극화를 양산한 뿌리가 된 만큼 사안의 심각성에 대해 정부와 국민이 충분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현 정부가 경제민주화를 대선 공약으로 삼았음에도 이는 오히려 뒷전인 채 1%밖에 안 되는 갑과 장단 맞추기에만 골몰하고 있다"며 "정부의 개혁의지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갑을갈등 주요 사건일지
4~5월 : CU편의점주 외 4명 매출부진으로 자살 → CU편의점 상생기구 마련 약속
5월 : 배상면주가 도매점주, 본사의 밀어내기 압박으로 자살 → 배영호 사장 관행 개선 및 재발방지 약속
5월 : 남양유업 본사 영업사원 막말 녹취록 파문 → 상생기구 마련 및 재발방지 약속
10월 : 국순당, 제품 밀어내기 논란 → 배중호 국순당 회장, 피해 대리점주들과 상생 대화약속
11월 : 아모레퍼시픽 막말 녹취록 파문 → 상생기구 마련. 전직 특약점주와는 협상 결렬
☞ 대안
1. 정부가 주도하는 '경제민주화' 법안 실천
2. 대기업 및 갑의 횡포 시 징벌적 손해배상
3. 기업의 자발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현
4. 사회적 감시기구 설립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11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재테크 경제주간지’ 머니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