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을 살고 있는 직장인에게 햄릿의 명대사 ‘죽느냐, 사느냐’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됐다. 직장인들은 ‘버티느냐, 나가느냐’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최근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희망퇴직·명예퇴직 등의 인력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나가게 된 노동자가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생존을 위해 희망퇴직을 단행하는 기업들과 일정의 위로금을 지급받고 거리로 내몰리게 된 노동자들이 급증하고 있는 것. 이에 <머니위크>는 희망퇴직이 일상화된 대한민국의 오늘을 진단하고,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희망퇴직자와 초강수를 둔 기업들의 속사정을 들여다봤다. 또 2016년으로 예정된 정년연장 법안의 실효성과 해외의 구조조정 사례 등 ‘희망퇴직의 시대’를 다각도에서 조명했다.
 
계 곳곳에 희망퇴직 바람이 거세다. 희망 직원들에 한해 위로금을 지급하며 퇴직을 권유하는 제도인데, 기업 입장에서는 '벼랑 끝에서 내리는 결정'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따라서 희망퇴직은 실적악화로 인한 구조조정의 충격을 줄이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희망퇴직을 실시한 뒤에도 실적악화가 지속되면 기업이 짊어져야 할 부담은 그 만큼 더 커진다. 희망퇴직자에게 거액의 위로금을 지급한 탓에 빠른 실적회복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보다 위태로운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KT다.


◆ KT, 당장 급한 불 껐지만… '위태'

KT는 지난 4월 실시한 희망퇴직을 통해 8300명의 인력을 줄였다. 지난 2003년부터 세차례 진행한 명예퇴직 가운데 최대 규모다.

KT가 희망퇴직을 실시하기로 결정을 내린 이유는 지난해 4분기 1494억원의 영업손실을 내며 창사 이래 처음으로 적자에 빠진 탓이다. 앞서 이석채 전 회장도 지난해 11월 초 사의를 표하며 "매년 경쟁사 대비 1조5000억원 이상의 인건비가 더 소요되지만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인력구조를 갖추지 못했다"며 인건비 축소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결국 이 전 회장의 후임인 황창규 회장이 매스를 들었다. 근속기간 15년 이상 직원에게 평균적으로 퇴직 전 급여 2년치의 위로금을 지급하는 조건을 내걸며 희망퇴직 신청을 받은 것. 일각에서는 퇴직 압력을 받았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희망퇴직을 강행했다는 뒷말이 무성했다. 결국 KT는 8300명에 육박하는 인원을 감축했다. 이로써 매년 약 7000억원의 인건비 절감 효과를 얻을 것으로 기대된다.

/자료사진=뉴스1
주목해야 할 부분은 희망퇴직자들에게 지급할 퇴직금 및 위로금이 약 1조2000억원에 달한다는 점이다. 일부는 내부자금으로 충당할 방침이지만 회사채 만기상환까지 겹치면서 외부조달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KT의 지난해 말 기준 현금성자산은 1조240억원이다. 게다가 지난 3월 원화채 발행을 철회하면서 5000억원 이상의 소요자금을 내부에서 해결한 탓에 자금사정이 좋지 않다. 올해 2분기까지 1700억원의 원화채와 6억달러의 해외채 만기도 예정돼 있다. 지난 3~4월 영업정지에 따라 매출도 일정부분 감소했을 것으로 보인다. 올해 1분기 실적은 엉망이었다. 영업이익 1520억원을 기록하며 흑자로 돌아왔지만 전년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58.6%나 감소하며 반토막났다.

업계 관계자는 "KT 명예퇴직자 중 상당수가 퇴직 압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며 "희망퇴직을 거부한 직원을 오지로 발령내는 등 '보복인사'가 단행됐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논란이 일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겉모양은 희망퇴직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인원감축을 해야 하는 KT의 절실함이 담긴 결정으로 판단된다"며 "앞으로는 KT가 자금난을 어떻게 해소할지가 관건"이라고 덧붙였다.

◆ 여전한 증권가 '구조조정 삭풍'

KT뿐만이 아니다. 인력 구조조정 움직임은 이미 업계 곳곳에서 일상화됐다. 최영기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상임위원은 "KT가 직원의 4분의 1을 내보냈는데 사회적 견제나 큰 갈등이 없었다는 것은 충격"이라며 "근로시간 단축, 임금조정, 휴직, 전환배치 등 기능적 유연화에 대한 노력 없이 바로 사람을 자르는 인력 구조조정이 업계를 불문하고 자연스럽게 행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같은 인력 구조조정 추세는 특히 증권업계에서 활발하다. 국내 증권사 직원 수는 지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최저수준으로 감소했다. 생존을 위한 노력이 직원 감축으로 끝날지 임금 삭감까지 이어질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지난해 KTB투자증권 100여명, SK증권 200여명, 한화투자증권 350여명이 희망퇴직을 했다. 삼성증권은 최근 근속기간 3년차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희망퇴직에 300여명이 신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양증권도 인력 구조조정을 시행했고 하나대투증권 역시 희망퇴직을 받았다. 대신증권은 6월부터 희망퇴직 신청을 받을 예정이다. 여의도 증권가에 여전히 삭풍이 불고 있는 셈이다.

김고은 아이엠투자증권 연구원은 "저조한 업황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비용을 줄여 살아남는 것 뿐"이라며 "지난해 말 기준 국내 63개 증권사 중에서 자본잠식 상태의 증권사는 10개, 2년 연속 자기자본이 감소한 곳은 21개에 달했다"고 설명했다.
/자료사진=머니투데이 DB
◆ 젊은 직원 퇴직 증가에 '딜레마'

한 증권사는 앞으로 지금과 같은 높은 보상을 제시하는 희망퇴직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직원들의 동참을 요구했다.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증권시장이 불러온 상황에서 마지못해 꺼낸 자구책이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희망퇴직을 마무리하고 한숨 돌리려던 증권사들은 이번엔 '희망퇴직 딜레마'에 빠졌다. 직원들의 희망퇴직 신청연령이 낮아지고 있어서다. 희망퇴직을 실시한 몇몇 증권사들은 구체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지만 다수의 30대 직원들이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그만뒀다는 상황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

업계에 따르면 과거에는 경력 10~15년 이상 차·부장급 직원이 가장 많이 희망퇴직을 신청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경력 5~10년 미만의 30대 대리·과장급이 크게 늘어났다. 업계 관계자는 "젊은 직원들이 증권업계의 미래를 불안하게 생각하며 이번 기회에 떠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젊은 직원들이 희망퇴직 신청으로 회사를 떠나는 것은 업황부진 장기화로 증권산업에 대한 매력이 크게 추락한 게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희망퇴직 바람은 어느덧 은행·보험업계까지 불어 닥치고 있다. 이를 두고 기업이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것은 이미 한계상황에 부딪힌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또한 대기업을 중심으로 고용규모가 줄어들면서 전반적인 고용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인 고용률 70% 달성과 정년 60세 연장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다. 최고가 아닌 줄은 알지만 최선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기업들의 인력 구조조정정책. 이 세찬 바람에 재계의 분위기는 더욱 경직되고 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3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