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차원의 일탈행위입니다.”
3분기 실적발표라는 이벤트를 잘 마무리짓고 연말과 내년을 준비하던 증권가를 난데없는 소식 하나가 뜨겁게 달궜다. 현대증권의 정부기금 운용수익 유용의혹이 그것이다.
지난 12일 김용남 새누리당 의원은 현대증권이 지난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고용노동부(고용노동보험기금·산재보험기금), 우정사업본부(우체국예금·보험), 기획재정부(복권기금), 국토교통부(국민주택기금) 등 4개 기관으로부터 위탁받은 정부기금을 랩어카운트로 거래하는 과정에서 약정된 수익률이 달성된 뒤 초과 발생한 수익을 다른 고객들의 계좌로 빼돌렸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랩어카운트란 고객이 맡긴 돈을 증권사가 주식과 채권, 파생상품 등에 투자해 수익을 내도록 관리해주는 종합자산관리계좌다.
이에 대해 현대증권은 곧바로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했다. “업계 기금운용방식을 준용했으며 고객의 수익을 유용하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뒤이어 금융감독원이 지난 7월 부문검사 당시 현대증권 랩어카운트 등 정부기금 일임계좌에서 위법행위를 발견한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자 현대증권은 입장을 소폭 수정했다. 현대증권 관계자는 “일부 직원의 배임사례가 발견되기는 했으나 회사 차원에서 저지른 일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 현대증권, ‘불법’저질렀나
이번에 김 의원이 제기한 ‘현대증권 기금운용수익 유용논란’의 초점은 두가지다. 첫째, 현대증권이 이면계약서를 이용해 정부기관들과의 기금운용 계약 당시 랩어카운트의 연수익률을 기간별로 3.8~4.2% 이상 보장하겠다고 약정했다는 것. 둘째, 현대증권이 약정해놓은 수익을 초과하자 이를 정부기관에 알리지 않은 채 초과수익을 이용해 또 다른 고객들의 손실을 보전해줬다는 것이다. ABCP(자산담보부기업어음)와 CP(기업어음)를 통해서다.
첫번째 의혹에 대해서는 다수의 증권업계 관계자 모두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투자자에게 손실 혹은 이익을 보장하는 행위는 명실상부한 불법행위다.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제55조에는 손실보전 등의 금지가 명시돼 있다. 하지만 금융투자업계에서 ‘슈퍼갑’으로 불리는 기금을 붙잡기 위해 관행적으로 그랬을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게 복수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두번째 논란과 관련 김 의원은 “부당거래는 현대증권만의 행태가 아니다”며 “다른 증권사들의 랩어카운트에서도 채권 헐값 매각이 만연하게 이뤄졌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증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회사차원에서 했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말한다.
현대증권 관계자는 김 의원이 제기한 의혹에 대해 “약정수익률보다 수익이 더 난 경우 초과수익으로 손실이 난 다른 계좌를 복구한 것은 맞다”며 “다만 해당 랩어카운트가 투자하는 자산포트폴리오의 재구성 차원이지 아예 다른 사람의 계좌 손실을 보전해준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금융감독원의 감사에서 모든 계좌를 검열한 결과 직원 2명의 불법행위가 발견된 것에 대해 “개인적인 차원의 배임행위로 금액은 1억1700만원 정도”라며 “이들에 대해 금감원도, 현대증권도 고소 및 고발조치를 했는데 이것 때문에 와전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만일 김 의원의 주장대로 1200억원을 편취했다면 현대증권이 한동안 적자로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형증권사인 A사에서 랩운용팀장으로 근무중인 K씨 또한 “김 의원의 자료를 살펴본 결과 과장된 측면이 많아 보인다”며 “ABCP나 CP 같은 어음은 채권과는 다르게 유동성이 떨어지므로 평가사에서 정한 가격보다 더 낮게 파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경제학에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있다. 어떤 물품에 대한 수요가 낮으면 가격은 내려가고 수요가 높으면 가격은 올라간다. 어음의 수요가 적기 때문에 공식적인 가격 대비 할인돼 거래되는 게 당연하다는 것.
이 관계자는 현대증권이 타 계좌의 손실을 보전해주기 위해 정부기금의 초과수익을 이용했을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현행법을 어기면서 회사가 조직적으로 지원하고 방조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면서도 “그러나 고객 가운데 ‘우선순위’를 매긴다면 최고는 기금들인데 그러한 슈퍼갑의 수익을 일부러 훼손할리는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다만 지난 7월 금감원의 감사에서 드러난 것처럼 현대증권의 한 직원이 액면가 3억원짜리 CP에 대해 할인율을 지나치게 높게 적용해 지인에게 넘겨 1억1700만원의 기금수익을 유용한 것만은 사실이다.
/사진제공=현대증권
◆ ‘관행’에 매몰된 증권가
현대증권의 위법의혹은 아직 공식적인 수사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로선 현대증권이 회사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정부기금을 유용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김 의원실은 이번 자료를 만들기 위해 증권사의 4개 기금운용 내역을 들여다보고 전직 펀드매니저 등을 접촉해 정보를 들은 것으로 전해졌다. 김 의원은 이러한 행위가 다수의 증권사에서 공공연히 일어나는 관행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증권업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불법 혹은 탈법행위가 자행돼 왔다. 예컨대 증권사들의 국민주택채권 매입가격 담합사건이 그렇다. 메신저를 통해 가격을 담합했다는 공정거래위원회와 감사원의 지적에 당시 증권사들은 “채팅방에 참여한 것은 업계의 관행적인 정보교환의 창구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정보를 파악하는 관행이었을 뿐이지 가격을 담합하려는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밖’에서는 이들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불법을 저지른 것으로 봤다. 지난 2012년 11월 공정위는 국내 증권사 20개사가 지난 2004년부터 국민주택채권 등 4가지 종류의 소액채권 금리를 담합해 부당매출을 올렸다고 밝혔다. 또한 과징금 192억원을 부과했다. 이들 가운데 15개 증권사가 공정위의 판단에 행정소송을 진행했지만 모두가 원고패소 판결을 받았다.
이번 현대증권 정부기금 수익률 유용의혹이 과거 동양증권 사태에 이어 또 한번 증권사가 투자자를 기만하는 사례가 될지, 아니면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현시점에서 일부 업계 관계자들은 그동안 관행적으로 이뤄졌던 불법행위 가운데 하나인 확정수익률 제시가 사라질 수 있다는 기대도 숨기지 않는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당분간 컴플라이언스(위험관리)가 타이트해지겠다”고 걱정하면서도 “확정수익률을 정해서 지급하는 관행이 사라지지 않을까 기대된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5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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