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방에 들어서자 종이와 풀 냄새가 풍겨온다. 눈앞에 저마다 다른 색깔로 물들어 은은한 불빛을 뿜어내는 전등갓들이 들어온다. 공방 벽 쪽에는 작은 장식품부터 큼지막한 가구까지 빼곡하다. 방금 전까지 공예작업에 심취했는지 취재진을 맞이한 정교순 늘픔한지공예 이사장(39)의 이마에 가느다란 구슬땀이 맺혀 있다.


 

/사진=임한별 기자

◆실용성·장식성 갖춘 한지공예


“우리 조상이 남겨준 문화유산인 한지공예는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두루 갖췄어요. 대부분의 일상생활용품으로 적합하죠. 게다가 한지 특유의 은은한 빛깔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준답니다. 이것 보세요. 누가 이걸 보고 한지로 만들었다고 생각하겠어요.”

한지로 만든 전등갓은 전에도 몇번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가구까지 그럴 줄을 몰랐다. 덩치가 꽤 큰 가구를 누가 한지로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했을까. 정 이사장은 놀라는 취재진의 모습이 너무나 당연한 듯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실 한지공예를 잘 모르는 분들은 많이 신기해 합니다. 가구들을 여기저기 훑어보고 만져본 뒤에야 한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더라고요. 한지가 재료라는 사실에 관심을 갖고 공방을 찾은 이들 중에는 이제 전문가가 된 사람도 꽤 있어요.”


한지공예는 실용성과 장식성을 함께 요구하는 현대생활용품에 적합하다. 더구나 제작기법이 크게 어렵지 않고 재료도 쉽게 구할 수 있어 취미생활로 삼는 사람이 꾸준히 늘고 있다. 정 이사장이 가르친 수강생도 벌써 500명이 넘는다. 이 가운데 한지공예 사범증을 따고 다시 수강생을 가르치는 사람도 100여명이다.


/사진=임한별 기자

◆타고난 감각, 남다른 손재주

“사실 저도 한지공예를 배운지는 오래되지 않았어요. 지난 2004년부터 한지공예를 주업으로 삼았으니 이제 11년 됐네요. 어렸을 때부터 감각과 손재주가 남다르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이게 한지공예에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정 이사장이 초등학교 5학년이었을 때 얘기다. 그 역시 또래 남자아이라면 모두 좋아했을 프라모델 만들기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과는 좀 다른 점이 눈에 띈다. 프라모델을 조립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색을 칠하는 작업까지 하는데다가 분무 페인트칠까지 능숙했다. 그의 손을 거친 것들은 대부분 프라모델 전문점에 전시됐다.

“만드는 것도 좋았지만 색을 칠하는 것도 흥미로웠어요. 성인이 돼서는 취미생활로 했는데 우연히 인사동 한지공예점에 들렀던 게 제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 같아요.”

28살 때 일이다. 친구들과 인사동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것. 마땅히 할 것도 없고 해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들어간 한지공예점의 내부 광경에 그는 반하고 말았다.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의 한지와 전등갓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불빛을 본 그때의 느낌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다고 한다.

“다음날 바로 인터넷과 발품을 팔아가며 재료들을 찾아 나섰어요. 한지공예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공방도 곧바로 등록했죠. 아마 몇달간은 제대로 잠을 자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한지공예에 제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어요.”

그가 처음 만든 작품은 휴지케이스다. 한지를 덧붙이고 풀칠하고 말리고, 또 한지를 덧붙이고 풀칠하고 말리고…. 이 작업을 수차례 반복하다가 밥도 먹지 않고 꼬박 이틀 밤을 새웠다. 지금이야 한두시간 정도면 그때보다 훨씬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지만 당시에는 태어나서 가장 행복하고 들떴떤 순간으로 기억한다며 추억을 떠올렸다.

◆밤낮으로 만든 500점, 전시회서 동나

“한지는 숨을 쉬어요. 스스로 공기를 빨아들이고 뱉어내는 습도조절을 하기 때문에 곰팡이가 생기는 일도 없어요. 오히려 나무는 습한 곳에 있으면 휘어지기도 하는데 한지로 만든 작품은 그럴 일이 없죠.”

한지공예로 탄생한 작품은 풀을 먹이고 건조하는 과정을 최소 5번 이상 거친다. 가구는 이 과정이 10번을 넘어선다. 작품은 이 풀칠·건조과정을 통해 단단하고 견고해진다. 마치 종이죽으로 탈을 만드는 것과 닮았다. 하지만 한지공예는 이 탈 만드는 과정을 여러번 반복하기 때문에 훨씬 더 견고해진다.

“공방에서 기술을 배우고 1~2년 동안은 문화센터 강사로 일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작품 만드는 것에만 몰두하며 스스로를 좀 더 견고하게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결국 강사 일을 그만두고 경기도 일산에 직접 공방을 차렸죠. 요즘에는 1년에 2~3번씩 전시회를 열어 작품 500점 정도를 내놓고 있어요.”

그의 작품은 인기가 많다. 전시회를 열 때마다 대부분 팔려나간다. 몇천원짜리 열쇠고리부터 수백만원짜리 가구까지 준비하지만 전시회가 끝난 뒤 작품으로 가득했던 공방은 휑하니 빈 공간으로 남는다. 그럴 때면 그는 다시 작품 만들기에 몰두한다. 낮이고 밤이고 그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오로지 한지에 풀을 먹이고 말려 색과 문양을 넣는 것이 그에게는 하루이자 생활이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74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