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여러분께 너무 큰 고통과 걱정을 끼쳐드렸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6월23일 삼성 서초사옥에서 메르스 사태에 대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부회장이 삼성을 대표해 대국민 사과문을 낭독한 것은 이번이 처음. 그는 "환자분들은 저희가 끝까지 책임지고 치료해 드리겠다. 관계 당국과도 긴밀히 협조해 메르스 사태가 빠른 시일 내 완전히 해결되도록 모든 힘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 부회장의 사과로 삼성서울병원에서 촉발된 메르스 사태 논란은 잠시 주춤하는 분위기다. 일각에선 오너일가의 사과 시기를 놓고 너무 늦은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 부회장의 선택에 일단은 긍정적인 평가가 주류다.

◆주변 만류 불구, 정면돌파 선택

이 부회장이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국민 사과를 한 것은 삼성 앞에 놓인 위기를 정면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해석된다. 아버지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와병 중인 상황에서 그룹의 실질적인 총수인 그가 자칫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을 경우 그룹 이미지 추락은 물론 향후 경영자로서의 행보에도 걸림돌이 될 수 있어서다.


또 삼성물산, 제일모직 간 합병 여부를 놓고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와 벌이고 있는 경영권 소송전이 메르스 사태와 결부돼 삼성 지배구조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된 것으로 분석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머니투데이 이기범 기자

신속한 대응으로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삼성만의 문화와도 연결돼 있다. 그동안 삼성은 초대 회장 때부터 위기마다 총수가 대국민 앞에 나서 진정성있는 사과와 함께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왔다.
이 부회장 역시 이번 대국민 사과를 통해 두마리 토끼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실질적인 삼성의 총수라는 상징성을 다시 한번 대외적으로 확인시킨 데 이어 진정성있는 사과로 삼성의 '위기론'을 일시적으로나마 잠재웠다는 것이다.

물론 사과발표 하나만으로 현재의 위기국면이 단번에 추스려질 수는 없다. 메르스 사태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만약 삼성서울병원에서 확진 환자가 계속 발생할 경우 "진정시키겠다"고 단언한 그의 리더십은 상처받을 수 있다.

그의 사과행보를 두고 삼성 내부에서도 찬반 의견이 엇갈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더구나 첫 공식석상에 나선 것이 사죄하는 자리가 되는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상당했다는 후문이다.

◆쇄신위원회 설치, 백신개발 지원 약속

이번 메르스 사태가 삼성그룹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힌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이 부회장의 사과발표문에도 언급된 '메르스의 진원지' 삼성서울병원의 쇄신여부에 재계의 이목이 쏠린다.

우선 이 부회장은 외부 전문가를 포함한 병원쇄신위원회를 만들어 메르스 사태의 발생 원인을 철저히 규명하고 의료관리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에 응급실을 포함한 진료환경을 개선하고 부족했던 음압 병실을 충분히 갖춰 환자들이 안심하고 치료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고 호언했다. 특히 음압시설은 국가지정격리병원에 준하는 25개 병상을 갖추고 진료하기로 했다.

백신(치료제) 개발 지원에도 적극 나설 것임을 밝혔다. 삼성서울병원이 자체적으로 치료제를 개발하는 대신 개발비용을 다른 연구기관에 지원하는 형식이다.

재계 관계자는 "메르스 사태로 국민이 생명을 위협받고 자영업자들은 생계를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렀다"면서 "이 부회장이 대국민사과를 통해 약속한 만큼 책임감 있는 자세로 메르스 사태 공포를 줄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진=뉴스1 정회성 기자

◆부드러운 리더십 구사, 승계준비 끝?
이 부회장의 공식 사과행보가 주는 메시지는 또 있다. 바로 삼성그룹 총수의 리더십 변화 부분이다. 그동안 "마누라와 자식빼고 다 바꿔라"는 이건희 회장의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이 그룹을 이끌었다면 이제 이 부회장의 부드러운 리더십이 새로 주목받고 있다.

이 부회장은 메르스 사태 사과문에서 병상에 누워있는 이건희 회장을 거론하며 "환자와 가족들의 불안과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치료에 헌신하는 삼성서울병원 의료진에게 격려와 성원을 보내달라"고 말할 땐 목이 메일 만큼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간 삼성그룹 총수에게서 볼 수 없었던 인간적인 리더십이 엿보인 부분이다. 이 부회장은 평소 부드러우면서도 좀처럼 화를 내지 않고 겸손한 성향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도 "(이 부회장을) 만나보면 낮은 자세에 놀라지만 때로는 열정적이고 유쾌한 면도 발휘한다"고 평가했다.

앞서 올초 신임임원 만찬에서 이 부회장은 "지난 한해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한해였다"면서 "그럼에도 (신임 임원들이) 좋은 실적을 내서 승진한 능력있는 분들"이라고 치켜세운 바 있다. 이어 "열심히 해달라"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내세우면서 이 부회장은 총수로서의 사업적인 성과 역시 속속 내놓고 있다. 지난해 8월 삼성전자와 3년 동안 특허전쟁을 벌인 애플 측과 소송 철회에 전격 합의한 게 대표적이다. 이를 위해 이 부회장은 지난해 6월 미국 시애틀로 출국해 팀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를 직접 만나 의견을 타진한 데 이어 다음달인 그해 7월 미국 아이다호주 선밸리에서 개최된 '앨런앤코 미디어 콘퍼런스' 행사장에서 또 한번 그를 만나 최종 합의를 이끌어 낸 바 있다.

올 3월엔 '세탁기 파손'과 관련, 삼성·LG 간 진행 중이던 법적분쟁을 합의로 마무리했다. 이 역시 이 부회장이 전면에 나서면서 양사의 불협화음이 화합으로 바뀐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사실상 총수에 오르면서 아버지인 이건희 회장과는 다른 리더십을 드러내고 있다"면서 "이번 대국민사과에서 밝힌 계획을 어떻게 실천하느냐가 그에 대한 리더십 평가의 시작점"이라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90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