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철강사는 계열사 간 통합과 인력 구조조정에 이어 철강재 추가 '가격인하'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동안 가격인하 문제를 놓고 수요처와 기싸움을 벌였는데 철강기업들이 수익난에 허덕이면서 스스로 한발 물러선 것으로 보인다.
주력사업을 바꾸는 철강사들도 눈에 띈다. 연관업종인 조선업계가 불황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자 철강업계가 후판 대신 철근이나 형강, 냉연(표면처리 강판) 등 수익성 위주로 포트폴리오를 재편하고 있다.
현대제철 용광로. /사진=머니투데이 DB
◆자존심 버린 철강업계 "생존이 먼저"
철강업계의 가격인하 이슈는 하루이틀에 발생한 게 아니다. 올 상반기까지만 해도 철강업체들은 가격을 더 낮추기 어렵다며 수요처의 요구를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일부 기업들이 가격인하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공급과잉과 중국산 저가 철강재 유입이 원인으로 꼽힌다.
실제 일부 철강사는 자동차에 공급하는 강판 가격을 인하할 방침이다. 인하폭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지난해보다 크지 않은 선에서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자동차 수출에 먹구름이 끼면서 수요처인 현대·기아자동차가 계속해서 강판의 가격 인하를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포스코와 현대제철은 지난해 현대·기아차에 공급하는 자동차 강판 가격을 톤당 13만~14만원 내린 바 있다.
조선용 후판 분야도 사정은 비슷하다. 포스코와 현대제철, 동국제강 등이 납품하는 조선용 후판 가격은 현재 철강사와 수요처 간 가격협상이 진행 중이다.
상반기엔 간신히 동결로 버텼지만 조선업계가 지속적인 불황을 맞고 있어 하반기엔 가격 인하가 불가피하다는 게 철강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실제로 조선업계는 연초 130억~150억달러의 수주 목표를 세웠지만 올해 상반기 목표치의 30%도 채 안되는 실적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포스코 포항제철소 열연 제품 생산. /사진=머니투데이 DB
앞서 철강업계는 지난해 상반기와 하반기 두차례에 걸쳐 후판 가격은 내린 바 있다. 정확한 가격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톤당 110만원 대비 최대 40% 낮은 가격까지 내려간 것으로 추산된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것은 철강재다. 저금리 기조로 건설업계가 조금씩 활기를 되찾으면서 철강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안심하긴 이르다. 철강재는 지난해 1분기부터 올해 2분기까지 단 한차례도 가격을 올리지 못했다. 지난해 1분기 톤당 72만5000원이던 건설사 공급 철근가격은 올 2분기 기준 톤당 60만원으로 떨어졌다.
철강업체 관계자는 "자동차 강판과 후판은 경기 침체 등으로 수요가 급감해 가격인하를 수용하는 분위기"라며 "그나마 철강재는 최근 수요가 늘면서 가격 동결 명분이 생겼다. 하지만 건설사들의 가격인하 압박이 워낙 심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지켜봐야 한다"고 귀띔했다.
◆통합·구조조정·포트폴리오 개선
이 같은 가격인하 흐름이 부각되면서 수익난에 빠진 업체 중 일부는 구조조정에 돌입하기도 했다. 수익 개선을 위해 생산설비를 폐쇄하거나 계열사를 통합한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일부 업체는 저가제품을 생산하던 기존 범용재 설비를 걷어내고 고부가 특화제품 생산라인을 신설하는 등 포트폴리오의 재편에 들어갔다.
본사 사옥 '페럼타워'를 매각한 동국제강은 최근 포항 제2후판공장을 폐쇄했다. 동국제강은 이 공장을 포함해 총 340만톤의 후판 생산능력을 보유했다. 특히 후판은 동국제강의 주력 사업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난해 후판생산량이 172만톤으로 전체 생산량의 절반수준까지 떨어졌고 후판부문 영업적자도 1260억원에 이르면서 주력사업을 철근 등으로 바꿔야 하는 처지다.
워크아웃이 유력한 동부제철도 지난해 1조원을 들인 당진 열연공장의 가동을 중단했다. 연산 300만톤 규모의 당진 열연공장은 2007년 국내 열연 공급이 부족현상을 보이면서 동부제철이 투자를 결정한 공장이다. 그런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철강시장이 공급과잉으로 돌아서면서 수익을 내지 못했고 지금은 동부제철 경영난의 가장 큰 원인으로 전락했다.
현대제철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이 회사는 최근 포항공장의 75톤(연산 70만톤) 전기로 설비와 연산 60만톤 규모의 철근공장을 폐쇄하고 매각을 추진 중이다. 폐쇄 후 철근 대신 고부가제품인 특수강 생산 전용라인의 신설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 이밖에 중견기업인 YK스틸은 제1제강 설비(전기로)를 매각해 40만톤을 줄였고, 삼승철강도 연 4만톤 규모의 강관 생산설비를 축소하기로 했다.
동국제강 후판 생산. /사진=머니투데이 DB
◆ "중국산 방어해야" 정부역할론 제기
철강업계의 대대적 구조조정과 가격인하 방침은 공급과잉에 따른 현실적인 대안이다. 그럼에도 철강업계는 불황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품질과 규격의 기준을 높여 중국산 등 저가 수입재 유입을 방어해야 한다는 것.
또한 제조업의 특성을 감안한 탄소배출권 거래제도도 손봐야 한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견해다. 실제 철강업체들은 올해 초, 오는 2017년까지 총 3억576만톤의 배출권을 할당받았다. 철강업계가 정부에 요청한 탄소배출권 총량은 3억2700만톤. 결국 업체들이 감축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생산 축소, 배출권 구입, 과징금 등의 부담을 져야 하는 상황이다.
물론 철강사의 자구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지속적인 연구개발(R&D)을 통해 고품질 철강재를 만들고 다양한 수요처를 확보하기 위해 해외시장 공략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주한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철강업계 활성화를 위해 국민의 안전을 저해하고 환경 문제를 야기하는 불공정·불량 수입소재의 수입을 근절하는 방안을 범정부차원에서 시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또 "기업 역시 과당경쟁, 과잉 설비 해소를 위해 업체 간 인수·합병을 추진하는 동시에 지속적인 R&D를 통해 고부가가치 생산에 주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91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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