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했다. 70년대만 해도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000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한국인은 불굴의 의지로 ‘한강의 기적’을 이끌어냈다. 2012년에는 1인당 GDP 2만달러와 인구 5000만명을 동시에 충족했다. 1인당 GDP는 30년 만에 20배 늘었다. 선진국이 100여년에 걸쳐 일궈낸 경제성과를 우리는 불과 한세대 만에 압축해 이룬 것이다.

이처럼 빠른 성장은 피로를 불러왔다. 피로는 모든 질병의 원인이 됐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성과물에 대한 압박에 피로마저 외면했다. “피곤하다”는 말은 바쁘다는 의미로 해석됐고 그것은 은근한 자랑이기도 했다. 그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을 채찍질하며 성공을 향해 열심히 달렸다. 그만큼 업무량도 늘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경제는 ‘불황’으로 답했다. 남은 것은 피로뿐이었다. 경기침체의 지겨운 터널 속에서 ‘피로’라는 키워드가 떠오른 이유다. 스트레스와 바쁜 삶에 지친 현대인들은 점차 피로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했다. 성공보다는 여유롭고 느긋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화려함이 아닌 평범함의 가치가 부각됐다. 소비의 욕망도 달라졌다. 웰빙이 조명 받으며 피로를 풀어주는 이른바 ‘피로산업’이 소비트렌드로 주목받고 있다. 

/사진=머니투데이 이동훈 기자

◆근로시간 세계 2위… 수면시간 최하위권
# 서울에 사는 직장인 최모씨는 최근 회사를 그만뒀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연봉이 높은 회사였다. 사표를 내던 날 김씨는 병원에서 각종 검사를 받았다. 큰 병은 없었지만 허리디스크, 안구건조증, 과민성대장염, 비염, 위염 초기증상 등 온몸이 질병 투성이었다. 원인은 만성피로였다. 쉬는 동안 김씨는 쌓인 피로를 푸는 데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퇴직기념으로 안마의자와 운동기구를 구입했다. 구입한 런닝머신으로 김씨는 매일 운동을 한다. 술과 육류를 줄이고 채소와 과일 위주의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영양주사에 의지하는 대신 비타민을 꼬박꼬박 챙겨먹는다.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이라면 김씨처럼 하루에도 여러번 사표를 낼까 말까 고민한다. 스트레스 때문에 마음은 물론 몸까지 아프면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

한국인의 피로감은 통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통계청의 ‘2014 생활시간 조사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10세 이상 한국인 하루 평균 수면시간은 7시간49분으로 나타났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8개국 중 최하위수준이다.

OECD 국가의 일평균 수면시간은 8시간22분으로 한국인의 평균 수면시간보다 33분 더 길다. OECD 국가 중 가장 오래 자는 프랑스인들은 우리보다 무려 1시간 1분이나 더 잔다. 특히 우리나라 성인의 평균 수면 시간은 한국갤럽이 지난 2013년 19세 이상 1만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시간35분에 불과했다.


노동시간은 이와 반비례한다. 한국인의 근로시간(연간 2163시간)은 지난 2013년 기준 OECD 34개국 가운데 2위를 차지할 정도로 길다. 한국인 근로시간은 OECD 평균의 1.3배이며 근로시간이 가장 적은 네덜란드와 비교했을 때 1.6배나 차이 난다. OECD 평균 근로시간은 1770시간이다.

한국인 근로시간은 2007년까지 1위를 차지했다가 주 5일 근무제와 시간선택제 확대로 2008년 이후 줄면서 멕시코에 이어 6년간 2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러한 OECD 통계를 들며 “한국인의 수면시간은 18개 조사 국가 가운데 최하위수준”이라고 보도했다.

긴 근무시간과 잠 부족은 만성피로의 원인이 됐다. 통계청 조사에서 지난해 10세 이상 국민 중 81.3%가 피곤하다고 응답했다. 10명 중 8명 이상은 피곤함을 느끼는 것이다. 특히 30대의 경우 90% 이상이 피로를 호소했다. ‘매우 피곤하다’는 사람은 27.2%, ‘조금 피곤하다’는 사람은 54.1%로 집계됐다. 남녀별로는 남자 80.3%, 여자 82.2%가 피곤함을 느꼈다. 연령별로는 30대(90.3%)의 피로도가 가장 높았다. 이어 40대(89.2%), 20대( 84.1%)가 뒤를 이었다.

피곤함을 많이 느낄수록 압박감도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매우 피곤함’을 느끼는 사람의 57.0%는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전혀 피곤하지 않다’는 사람의 74.3%는 여유가 있다고 느꼈다. 

승객으로 꽉 찬 심야버스. /사진=뉴시스 박문호 기자

◆피로 관리산업 성장세
스트레스에 지친 현대인들은 몸의 피로를 풀어주는 상품이나 서비스에 기꺼이 돈을 쓰기 시작했다. 이 같은 현대인의 욕구를 겨냥한 제품이 시장에 나오면서 안마의자, 건강기능식품 등 피로관련산업이 상승세를 타고 있다.

깊고 편안한 잠을 유도하는 ‘숙면시장’ 역시 급부상하고 있다. 돌침대, 베개, 매트리스 등 침구류 제품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숙면 유도를 위한 치료제나 아로마 등 수면관련 제품도 조명 받고 있다.

김나경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과거에는 가정보다 회사를 중요시하며 일에 파묻혀 희생하는 분위기였다면 요즘은 개인과 가족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며 “한국인의 소득수준이 올라가면서 삶의 질을 돌아보는 이들이 늘었다”고 말했다.

김 연구원은 “갈수록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사람들은 늘 긴장 속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피로를 풀어주는 산업이 발전하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노동강도가 높은 한국사회의 특성상 앞으로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피로관련산업의 발전은 정비례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우리나라가 성장한 후에는 여유가 생길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하지만 성과를 요구하는 사회는 어느새 당연시됐고 여전히 사람들은 빠른 속도와 성장을 강요당한다. 피로관련산업이 커지는 것도 한국인의 삶이 그만큼 고달프다는 걸 의미한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9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