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세상이다. 지식도 빠르게 변한다. 사람들은 날마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 오늘 확실했던 지식이 내일은 어리석은 것이, 과거에 그른 것이 오늘날엔 옳은 것이 되기도 한다. 한번 찍힌 활자는 언젠가 쓸모없는 글자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정제된 지식의 보고인 종이책은 시대를 따라잡기가 버겁다.

한때 책의 시대를 주도했던 한국소설은 ‘무겁고 늙은 장르’라는 자조 섞인 이야기마저 나온다. 2000년대 이후 출판시장은 그야말로 ‘말라죽을’ 위기에 처했다. 그렇게 종이책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사진=뉴스1 DB

◆뿌리째 흔들리는 종이책시장
요즘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을 보기가 어렵다. 2000년대 후반 이후 독서시간과 독서량 자체가 줄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최근 5년간 한국인의 하루 평균 독서시간은 평일 26분으로 조사됐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이용시간이 2.3시간, 1.6시간인 것에 비하면 턱없이 짧다. 성인 1인당 연간 독서량은 9.2권(월 0.76권)에 불과하다. 한달에 책을 한권도 읽지 않는 것이다.

자연스레 책을 구입하는 사람도 줄었다. 통계청의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올 2분기 전국 2인 이상 가구의 월평균 서적구입비는 1만3330원으로 1년 전(1만5300원)보다 13.1% 줄었다. 통계가 시작된 2003년 이래 전체 분기 중 최저치다.


종이책 독자가 사라지면서 출판산업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지난해 국내 4만7000여 출판사를 조사한 결과 1년에 1권이라도 책을 발간하는 출판사 수는 6100여개(12.9%)에 불과했다.

발행 부수 역시 줄었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조사한 출판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도서발행 부수는 9416만5930부로 IMF 외환위기를 맞은 1998년(1억9053만5987부)보다 1억부가량 줄었다. 서점도 문을 닫았다. 한국서점조합연합회에 따르면 1998년 4897개였던 서점 수는 2013년 1625개로 3분의 2가 줄었다. 특히 순수 서점이 2000년 이후 줄줄이 폐업했다.

종이책시장을 흔드는 최대요인은 ‘스마트 충격’이다. 매체가 종이에서 화면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종이책은 외면을 받았다. 스마트기기 사용자들은 책이 아니라 게임·영화·뉴스 등의 콘텐츠를 선택했다. 그렇다고 해서 전자책으로 출판콘텐츠가 이동하는 것도 아니다. 출판업계는 전자책시장에 기대를 걸고 있지만 출판시장에서 전자책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2~3%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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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에 최적화된 콘텐츠 확보해야
출판업계는 종이책 멸종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출판사 한 관계자는 “2000년대 말 스마트폰의 확산으로 출판업계는 날로 쇠퇴하고 있다”며 “전자책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직감한다”고 말했다.


80~90년대에는 출판사와 독자의 거리가 가까웠다. 책 종류가 적었고 독자들은 신간이 나오면 관심을 보였다. 한국문단의 전성기여서 활자매체의 힘이 엄청났다. 당시엔 출판 편집자들이 독자에게 전달되는 책의 경로를 파악하기가 수월했다. 그러나 지금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독자를 만날 채널이 훨씬 다양해졌지만 책의 움직임을 파악하기는 어려워졌다. 사실상 독자와 출판 편집자 간 거리가 멀어진 것이다.

하지만 종이책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출판업계의 전망이다. 이 관계자는 “과거 TV가 등장하면서 라디오가 사라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여전히 라디오는 미디어매체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듯 종이책도 마찬가지”라며 “과거에는 종이책이 소설부터 인문학, 심지어 전화번호까지 독자에게 다양한 지식을 전달했다면 앞으로는 점차 본질적인 것만 남는 추세로 흐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출판업계 전반적으로 종이책으로만 읽을 수 있는 콘텐츠가 무엇인지 찾고 있다는 설명이다.

요즘 출판의 위기는 문학의 위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문학이라는 전통적 시장의 활성화가 근본 대책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출판업계 관계자는 “현재 10위권 수준의 대형출판사까지 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며 “출판시장이 뿌리까지 흔들리는 이유는 단순히 전자책의 등장이나 종이책만의 문제가 아니다”고 털어놨다.

이 관계자는 “우선 한국문학이라는 전통적인 시장이 무너지면서 독자가 책을 알 수 있는 통로 자체가 줄어들었다”며 “지금의 한국문단은 책시장을 이끌 만한 뚜렷한 리더그룹 없이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작가들만 넘쳐난다”고 일갈했다.

그는 “영화나 드라마에 어떤 책이 나오느냐에 따라 베스트셀러가 바뀔 정도로 외부요인에 휘둘리는 것도 출판시장 자체가 허약하다는 방증”이라며 “현재 유통논리가 주도하는 규칙으로는 출판업계가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빈약한 콘텐츠가 아닌 출판에 최적화된 문학과 인문학 자체가 살아나야 한다”며 “양질의 콘텐츠를 확보한다면 종이책은 살아남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종이책은 새로운 생존의 기로에 놓였다. 시장과 독자가 긴 호흡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절실한 상황이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추석합본호(제402호·제40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