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임한별 기자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노인을 위한 세상이 있다. 365일 단돈 2000원에 명화를 볼 수 있는 곳. 최근 TV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에도 소개돼 화제를 모은 ‘실버영화관’이다. 향수에 젖게 하는 1900년대 영화와 복고적인 간판, 그 옛날 노랫가락이 흘러나오는 이곳은 2015년을 사는 어르신들의 놀이공원으로 유명하다. 실버영화관을 운영하는 사회적기업 ‘추억을파는극장’은 어르신을 위한 효를 목적으로 영화에서 식당사업과 패션뷰티 등으로 영토를 넓히고 있다.
◆평균나이 63세 “응답하라 추억이여”
지난달 25일 오후 2시. 낙원동의 실버영화관을 찾았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몰려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푸르른 녹색광장 야외무대와 그 맞은편의 매표소가 반긴다.
매표소 주변으로는 이달의 프로그램이 걸려있다. 단관극장인 만큼 하루 한편의 영화만 상영된다. 이번주 간판프로그램은 중년의 로맨스를 그린 셀리아 존슨과 트레버 하워드의 <밀회>. ‘365일 영화 한편에 2000원’, 55세 이상 어르신들을 위해 열려있는 이 영화관은 저렴한 표값을 자랑한다.
“우리들이 갈 데가 많이 없지. 여기 생긴 이후로는 자주 와.” 표를 끊고 자리에 앉아 영화시간을 기다리는 70대 어르신은 동년배의 친구를 만나 심심할 때면 종종 이곳을 찾는다고 말했다. 저렴한 가격은 물론 비슷한 연배의 사람을 만날 수 있어 적적할 때나 말벗이 필요할 때 언제든 발걸음한다는 것.
사진=임한별 기자
오전 10시30분을 시작으로 오후 5시40분까지 총 5회(영화마다 상이함)가 상영되는 동안 실버영화관의 로비는 북새통을 이루다 썰물처럼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하루 평균 1000명의 어르신이 이곳을 찾았으며 지난 5월에는 2009년 설립 후 6년 만에 누적관람객 100만명을 돌파했다.
인기의 원인은 단순히 저렴한 표값과 명화 선정에 있지 않다. 시력이 나쁜 어르신을 위해 일반상영관보다 글씨를 크게 키웠고 자막은 하단 맨 끝이 아닌 중간 아래쯤에 배치했다. 고개를 돌리는 등의 조그만 움직임도 불편할 수 있는 어르신을 위한 배려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을 위해 곳곳에 손잡이를 달아둔 것은 물론 자주 깜박하는 어르신들을 위해 예매서비스도 없앴다. 모바일이나 PC에 취약하기 때문에 예매서비스 이용률이 높지 않을뿐더러 표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아 당일 예매 외에는 현장구매만 가능하도록 이곳만의 ‘규칙’을 만든 것이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을 위해 곳곳에 손잡이를 달아둔 것은 물론 자주 깜박하는 어르신들을 위해 예매서비스도 없앴다. 모바일이나 PC에 취약하기 때문에 예매서비스 이용률이 높지 않을뿐더러 표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아 당일 예매 외에는 현장구매만 가능하도록 이곳만의 ‘규칙’을 만든 것이다.
실버영화관의 초창기인 2009년에는 영화관 한쪽에서 어르신을 위한 추억의 국화빵도 구웠다. 로비에는 교복을 입은 DJ가 LP판을 틀어 복고 분위기를 한층 살렸다.
◆문화사업 확대 “생전에 해야”
지금은 영화관 밖으로 복고를 확장했다. 코 닿을 거리에 위치한 밥집 ‘추억더하기’와 여성들의 미용을 위한 ‘어르신뷰티살롱’이 그것이다.
3000원짜리 집밥 도시락을 먹으면서 DJ에게 음악신청을 하고, 차 한잔을 마시면서 미용을 곁들일 수 있다. 어르신들은 이곳을 마치 ‘코스’처럼 이용한다. 밥을 먹고 영화를 보러가거나 영화를 보고 나와 후식을 먹는 식이다. 기분전환을 하고 싶다면 뷰티살롱을 찾아 머리도 하고 화장도 한다. 모두 다해도 1인당 1만원이 들지 않는다.
이날 처음으로 영화관을 찾았다는 60대 어르신은 3회 차(2시10분) 영화를 보고 나와 어르신뷰티살롱을 들렀다. 화장을 권유하는 지인의 말에 처음에는 부끄러워했지만 이내 자리에 앉더니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3000원인데 한번 해보지 뭐.”
가라앉아 있던 머리카락에 헤어 롤을 말고 화장기 없던 얼굴에 분칠을 하자 어르신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핀다. “결혼하고 처음이지. 누가 화장을 해주겠어요. 오늘 완전 횡재한 기분이에요. 1만원으로 다 할 수 있네.” 어르신뷰티살롱에서는 무료로 머리와 화장을 할 수 있다. 미용자격증을 가진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3000원만 지불하면 된다.
뷰티살롱의 미용전문가를 포함해 추억더하기에서 도시락을 만들고, 영화관에서 표를 검사하고 영사기를 돌리는 이곳의 관계자 모두 55세 이상의 어르신이다. 평균나이 63~64세. 종로 일대에만 70여명의 어르신들이 또 다른 어르신을 위해 일한다. 이들 모두는 사회적기업 추억을파는극장 소속 직원이다.
어르신들에게 새로운 바람을 일깨운 추억을파는극장의 목표는 효도사업을 보다 확대하는 것이다. 김은주 대표는 “어르신들 중 ‘이런 것이 있으면 좋겠다’고 소박한 바람을 얘기해주시는 분들이 많다”며 “여력이 없어도 안할 수가 없는 게 자꾸 한분한분 세상을 떠나신다. 살아계실 때 해야겠다는 생각뿐”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종로의 젊은 영웅', 김은주 추억을파는극장 대표
[인터뷰] '종로의 젊은 영웅', 김은주 추억을파는극장 대표
“망할 것 같은데 왜 하냐고요? 지금이 아니면 못하는 일이니까요.”
김은주 추억을파는극장 대표는 지난 2009년 1월 종로의 허리우드극장을 인수해 오늘의 실버영화관을 만들었다. 그녀가 ‘어르신’에 주목한 것은 단순한 이유였다. 대한민국 어디에도 없고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2000원이어야 어르신들이 행복할 것 같았어요. 1년 만에 8억원 적자를 봤지만 전 그때 희망을 봤죠. 하루 100명에서 300명, 500명…. 어르신 관람객이 늘기 시작했고 고맙다고 말해주는 분들이 많았어요. 사업이 존폐위기에 놓였던 2010년에는 극장 단골 어르신께서 제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진 것을 보고는 선뜻 3000만원을 빌려주셨을 정도예요.”
사회적기업이 홀로서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실버영화관이 생긴 2009년 초, 설립 취지를 긍정적으로 본 SK케미칼 측에서 후원을 약속했고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든든한 후원사로 남아있다.
“잘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는 상태에서 SK케미칼이 손을 내밀었어요. 사회적기업은 수익이 우선시되면 안돼요. 사회 전체에 긍정적인 의미를 던져야죠. 홀로서기를 위한 준비도 필요합니다. 정부지원이 줄어든다고 해서, 기업 후원금이 축소된다 해서 사업을 접을 수는 없잖아요? 극장이 없어지면 어르신들의 박탈감이 얼마나 크겠어요.”
김 대표가 사회적기업에 갖는 애착도 상당하다. 그는 사회적기업을 꿈꾸는 미래의 CEO들에게 '셈'보다 '진심'이 앞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회적기업가란 호칭은 제게 하나의 돌파구이자 책임감이에요. ‘무엇하러 이런 수익도 안나는 걸 해’, ‘넌 왜 그 길을 가니’라고 누군가 물을 때 ‘내가 사회적기업가라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직업이죠. 사회적기업은 그 회사의 CEO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사회적기업가를 꿈꾼다면 셈하지 마세요. 진심을 담지 않았다면 성공할 수도, 사회적기업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1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1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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