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를 사흘 앞둔 지난 3일 오후 서울가정법원. 재계 5위 롯데의 창업주가 힘겹게 법정으로 향했다. 그 뒤로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한 듯 휠체어가 준비됐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아들 형제의 경영권 다툼 도중 느닷없이 ‘정신상태’를 증명해야 할 처지에 몰렸다. 그의 여동생 정숙씨가 지난해 12월 “오빠의 판단력에 이상이 있다”며 ‘성년후견인’ 지정을 신청해서다.


그동안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신정숙씨. 신 총괄회장의 여덟번째 동생인 그는 남편 최현열 롯데 고문의 내조에 전념했다. 경영 일선에 참여하지 않던 그였기에 갑작스럽게 오빠의 후견인을 요청한 이유를 두고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정숙씨의 등장 배경을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 측은 남편에 대한 ‘복수’ 차원으로 해석했다. 신 전 부회장 측 법률대리인에 따르면 신 총괄회장은 법정에서 “정숙이 걔 판단력에 이상 있는 것 아니냐. 그 애 남편을 내가 데리고 있다가 내보내선가”라며 불쾌해 했다. 최 고문은 롯데물산, 캐논코리아 등에서 사장으로 근무하다 1987년 열기구업체 남경사를 차리며 독립했다.

하지만 정숙씨 측 변호인은 “최현열씨가 롯데 고문으로 있는 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게 아니라 은퇴 후 자연스럽게 독립 사업을 꾸린 것”이라고 일축했다. 또 “열 형제 중 정숙씨가 왕회장과 가장 자주 만나 가까웠다”며 “경영권 때문에 조카들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기 힘들어 후견인을 신청했다”고 강조했다.

어찌 됐든 재판부가 신 총괄회장의 건강상태를 어떻게 판단할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외형상 후견인 지정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지만 그 결과에 따라 롯데그룹의 경영권 향방은 큰 변수를 맞는다.


법원이 성년후견이 필요없다고 판단하면 후계자로 지목된 신 전 부회장이 유리한 위치에 서는 반면 신 총괄회장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결정이 내려지면 신동빈 회장의 입지가 굳어진다.

신 총괄회장의 건강상태는 정말 심각할까. 이 역시 신 전 부회장 측이 “법정에서 신 회장의 의사표현이 정확했다”며 후견인이 필요없다는 입장인데 반해 정숙씨와 롯데그룹은 “같은 말을 수십번 되풀이하는 등 치매 증상을 보이고 있다”고 맞선다.
두 주장 중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운지는 재판부 손에 달렸다. 후견인이 정해지더라도 경영권 분쟁은 더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힐 가능성이 크다. 후견인 후보로는 신 총괄회장의 부인 시게미쓰 하쓰코씨와 두 아들, 딸 영자·유미씨가 모두 포함됐다. 50년 역사를 지닌 유통명가 롯데가의 ‘가족 상잔’을 지켜보는 심정이 답답하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2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