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들었으면 어서 현금카드나 채워!”

애니메이션 <카우보이 비밥-천국의 문>의 첫 장면에서 편의점에 난입한 강도가 아르바이트생에게 총을 들이밀며 이렇게 협박한다.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 ‘스파이크’가 사는 세상에서는 돈 대신 전자화폐를 사용한다. 헌터를 칭하는 카우보이들의 상금거래도 마찬가지. 자신의 현금카드에 경찰로부터 받은 데이터를 입력하는 식으로 거래가 이뤄진다.


3000년간 인류와 함께 해온 현금이 사라지고 있다. 30여년 전 아버지의 월급봉투가 사라졌듯 현금을 넣는 지갑, 어린이에게 절약정신을 심어주던 돼지저금통, 동전을 던지며 소원을 빌던 분수대의 낭만도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질 처지에 놓였다. 지갑 안에 들어가야 할 현금은 신용카드로, 신용카드는 점차 스마트폰 속으로 스며든다. 그렇게 ‘현금 없는 사회’가 천천히 다가온다.


삼성페이. /사진=뉴시스DB

◆현금의 종말 후 변화하는 삶
# ‘삑’. 출근길에 오른 직장인 A씨가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스마트폰을 교통카드 단말기에 갖다 댄다. 스마트폰 안에 교통카드 기능이 탑재돼서다. 퇴근 후 지인들과 저녁을 먹고 더치페이 애플리케이션으로 식사비를 지불한다. 귀갓길에는 결혼하는 친구에게 뱅킹서비스를 통해 ‘축하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축의금을 전송한다.

이 시나리오는 곧 생활화될 미래상이다. 물론 일부는 지금도 현실화됐다. 현금이 사라진 자리는 신용·직불카드와 앱이 메우는데 앱의 비중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현금 없는 사회가 현실화됐을 때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① 거스름돈, 직불·선불카드에 충전


가장 먼저 동전부터 사라질 전망이다. 한국은행은 2020년까지 동전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한은이 구상하는 동전 대체수단은 충전식 선불카드다. 소비자가 현금으로 결제하면 거스름돈을 충전식 카드에 적립해준다는 것이다. 예컨대 고객이 현금 1만원을 내고 9300원짜리 물건을 사면 거스름돈 700원을 동전으로 거슬러주는 대신 고객의 카드에 충전해주는 식이다.

김정혁 한은 전자금융팀장은 “전자지갑, 모바일카드 등 모바일 기반의 결제수단이 등장함에 따라 현금을 들고 다닐 일이 없어졌다”며 “우리나라 문화 특성상 당장 모든 현금이 사라지기는 어렵겠지만 점차 충전식 직불·선불카드를 사용하는 게 보편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스퍼.
② 전자용돈 받는 아이들
# ‘사랑하는 우리 손주. 세배하는 모습도 예뻐요. 할머니가 세뱃돈 많이 못 보내 미안해요. 새해 복 많이 받고 공부 열심히 해요’. 설 명절 스마트폰 영상통화로 세배를 받은 B씨는 손주의 직불카드에 세뱃돈을 넣어준다. 덕담도 잊지 않는다. B씨의 아들은 B씨에게 새해 선물로 약국에서 쓸 수 있는 포인트를 보낸다.

이처럼 현금이 없어지면 우리나라 특유의 풍습도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 할머니가 고의춤에서 꺼내 쥐여주던 꼬깃꼬깃 접힌 지폐의 정겨움, 세뱃돈을 받아들고 득의만만해하는 아이의 표정,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노잣돈이나 하시라”며 돈을 주던 풍경의 아스라함을 과연 모바일 머니가 구현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용돈문화가 바뀌면 10대를 타깃으로 한 금융상품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이미 영국의 경우 모바일은행 ‘오스퍼’(Osper)에서 8~18세를 위한 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부모가 아이 명의로 된 오스퍼 직불카드를 만들어 여기에 용돈을 입금하는 식이다. 아이는 입금된 금액 안에서만 돈을 쓸 수 있다. 용돈 사용내역은 앱을 통해 부모와 아이 모두가 볼 수 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품이 나올 것으로 점쳐진다.

벤모.
③더치페이, 결제앱으로 간편하게
동창회나 모임에서 회비를 걷는 일도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아직 우리나라는 현금 혹은 계좌이체로 각자 비용을 부담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지만 앞으로 더치페이용 앱 사용이 늘어날 전망이다.

실제 더치페이가 익숙한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모바일 결제앱 ‘벤모’(Venmo)가 인기를 끈다. “나에게 벤모해!”(Venmo me: 각자의 식대를 모바일 앱으로 송금하라)라는 신조어가 등장했을 정도다. 벤모는 개인 간 모바일결제와 소셜네트워크 기능을 갖춰 대화를 나누며 돈을 주고받을 수 있다. 식당에서 한사람이 총액을 결제하고 동석자들은 돈 낸 사람에게 벤모로 즉석에서 자기 몫의 식대를 송금하는 식이다.

④ “카드 안 받아요”→ “현금 안 받아요”

현금 사용이 줄면서 ATM(출금기능만 있는 CD기 포함)기기도 사라지는 모양새다. 이에 따라 시중은행 지점들도 점차 현금(시재금)을 보유하지 않고 전자적 결제수단만으로 업무를 진행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 2013년 스웨덴 스톡홀름의 한 은행에 침입한 강도가 빈손으로 돌아간 일이 발생했다. 은행이 보유한 현금이 없어 강도가 돈 한푼 못 챙기고 허탕을 친 것.

또 앞으로는 길거리 노점상도 현금 대신 카드결제기를 갖추고 손님을 맞아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노숙자가 현금 대신 직불카드로 돈을 받을 날도 머지 않았다. 최근에는 교회나 성당, 절 등의 종교시설도 현금 없는 사회 대열에 합류했다. 카드리더기를 두고 헌금 또는 보시금을 받는 종교시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생활패턴 천천히 변화 예상

하지만 우리나라에 현금 없는 사회가 완전히 자리 잡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관측된다. 90%에 이르는 높은 카드보급률에도 불구하고 돈을 직접 주고받는 것에 정을 느끼는 국민정서상 현금 선호현상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김진우 IBK경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문화의 변화는 기술이나 수단의 변화보다 그 속도가 더디기 때문에 현금이 사라진다고 해서 계, 축의·부조금 등의 문화가 바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며 “(이런 문화에) 변화가 있더라도 현금이 사라져서라기보다는 다른 분야의 변화에 기인할 확률이 높다”고 진단했다. 김 연구원은 “변화과정 속에서 약간의 갈등이나 어려움을 겪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지급수단이 현금에서 카드나 모바일결제시스템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2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