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법 없이 과당경쟁… 업계-기사 '저수익 굴레'

#. 택배기사 A씨는 본사로부터 건당 820원의 배송수수료를 받는다. 대리점에서 40원을 떼가고 나면 수중에 떨어지는 금액은 780원. 하루 200건을 배송하면 한달에 많아야 350만원가량 번다. 하루 12시간씩 한주에 6일을 꼬박 일해야 채울 수 있는 금액이다. 기름값과 식대 등을 제하면 300만원이 채 안된다. 만약 배송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책임은 고스란히 B씨의 몫이다. B씨는 “이것저것 따져보면 택배 한건을 배달했을 때 얻는 실제 소득은 500원 수준”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출범한 택배연대노조는 이같은 노동환경을 개선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전국단위 택배기사 노조다. 택배업계는 술렁인다. 업계의 노동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지만 구조적인 문제에 신중히 접근하지 않고서는 자칫 혼란만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 택배업계 궁극적 문제는 ‘단가’
택배기사 노동환경이 열악한 가장 큰 이유가 택배회사에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저임금으로 택배기사의 노동을 쥐어짜는 주체여서다. 직접고용이 아닌 지입제 운영 등 특수고용관계부터 관행적으로 이뤄지는 불법파견까지 택배회사의 문제점은 지속적으로 지적됐다.

하지만 현실을 알고 보면 택배회사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기도 쉽지 않다. ‘택배업 호황’ 속에 매년 사상 최대의 물동량을 기록하지만 영업이익률 개선의 기미는 보이지 않아서다.


물동량이 늘며 매출액도 증가하는 추세지만 영업이익률은 업체별로 1~3% 수준에 불과하다. 경쟁 심화로 택배단가가 곤두박질치고 있어서다. ‘박리다매’ 형태로 겨우 영업이익을 채우는 상황에서 기사에게 지급하는 건당 수수료가 늘어나면 업체도 살아남기 힘들다. 택배서비스가 제값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현재의 문제가 반복된다는 주장이다.

택배업계 관계자는 “택배기사의 처우가 개선돼야 한다는 것에는 공감하지만 회사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상황”이라며 “국내에서 택배사업자는 화주에게 철저한 ‘을’의 위치”라고 말했다.

실제로 국내 택배단가는 세계 최저수준이다. 한국통합물류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택배업계의 택배 평균 가격은 1개당 2318원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평면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미국과 일본 등지의 5분의1 수준에 불과하다고 업계는 토로한다. 
2318원이라는 수치도 허수다. 이 평균치는 단가 5000원 수준의 C2C(소비자 간)거래로 인해 다소 희석된 가격이다. 실제 택배물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B2C(기업-소비자 간) 거래는 건당 최저 1300원대에 계약되기도 한다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 일부 화주들은 업체 간 경쟁입찰을 통해 택배회사의 가격을 후려치고 소비자에게는 배송비 명목으로 2500원을 받는다. 1000원가량인 마진은 화주가 챙긴다.


이런 구조가 고착된 배경에는 택배업계의 과도한 경쟁이 있다. 국내에 최초로 택배가 도입된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택배 평균단가는 4000원대를 유지했다. 1998년에는 4486원으로 최고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가 규제완화 차원에서 택배업 진입의 법적 장벽을 허문 이후 과당경쟁이 심화됐다. 2000년대 초에는 전국에 200여개의 택배업체가 난립하기도 했다. 업체 대부분이 과당경쟁을 버티지 못하고 도산했지만 저단가의 악몽은 지속됐다. 택배업계 관계자는 “수많은 업체가 버티지 못하고 떠났지만 저단가의 폐해는 남은 업체들에게 그대로 전가됐다”고 말했다.

특히 2000년 우정사업본부가 택배업에 뛰어든 이후 민간택배사의 가격인하 압력은 더 커졌다. 우편법의 적용을 받아 민간업자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우체국과 경쟁하기 위해선 단가를 더 낮추는 방법밖에 없었다는 게 택배사업자들의 변이다.

◆ 택배단가 딜레마, 정부가 나서야

택배기사의 노동환경을 개선하는 동시에 택배사업자가 정상적으로 사업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단가를 인상하는 것이 유일한 방안으로 지목된다. 택배업계 관계자는 “택배업계에선 ‘운임 인상’이라는 말 대신 ‘운임 정상화’라고 말한다”며 “그만큼 비정상적인 단가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택배사업자가 스스로 가격을 정상화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치열한 시장상황 속에서 한 업체가 단독으로 단가를 올리면 시장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어서다. 그렇다고 업체들이 모여 단가를 함께 올리면 담합으로 몰린다. 실제로 최근 공정거래위원회는 CJ대한통운, 한진 등 대형 택배업체들이 운임을 담합했다는 제보를 받고 조사하기도 했다.

따라서 시장에 맡겨놔서는 택배단가를 정상화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배명순 한국통합물류협회 사무국장은 “택배업은 보편적이고 공공성을 가진 서비스가 됐다”며 “국가에서 노동문제 해결과 산업생태계 보호를 위해 일정부분 관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업계는 정부가 최저운임 등을 설정해 시장황폐화를 막고 ‘가격’이 아닌 ‘서비스’ 경쟁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배 사무국장은 “소비자와 사업자, 근로자 모두가 인정할 수 있을만한 최저운임이 설정되면 가격과 서비스 모두를 놓고 공정한 경쟁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단가뿐 아니라 택배서비스에 대한 관련법규 전반을 정비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우리나라에 택배산업이 등장한 지 25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관련법규는 미흡하다. 화물차를 이용한다는 이유로 화물운수사업법에 묶여있을 뿐이다. 공정위가 정한 택배표준약관이 있지만 법적 강제성이 없어 소비자 불만도 많다.

배 사무국장은 “가장 전도유망한 산업으로 택배를 꼽으면서도 아무런 법적 제도가 없다”며 “화물운수사업법 안에 몇가지 규정을 넣어서라도 택배산업 생태계를 보호해야한다”고 강조했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7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