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일제는 왜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의 서울성곽을 허물고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을 만들었을까. 이곳에는 조선시대 훈련도감의 하급부대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하도감(下都監)과 화약제조 관서인 염초청이 있었다. 고종 때 일본의 후원으로 창설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군대 별기군 자리도 이곳이다.


하지만 구식군대와의 차별대우가 문제를 키웠다. 불만이 쌓인 구식군대가 1882년 6월5일 임오군란을 일으킨 장소가 이곳이다.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을 급료로 지급하는 등의 횡포를 참지 못한 것이다. 당시 공병 소위 호리모토 레이조를 포함한 일본인 13명이 살해됐고 이에 분노한 일본인들이 이곳을 없애려고 했을 것이다.

또한 이 자리는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무력으로 진압한 청나라의 원세개 군대가 진주했던 터다. 여기에 머물던 청군은 창덕궁으로 쳐들어가서 일본군을 물리치고 고종을 강제로 청군진영으로 데려왔다. 고종은 정변이 끝난 후 환궁했다.

하도감 터는 한일합병 후 일제강점기에 훈련원공원이 됐고 그때 몇동의 건물과 연못이 들어섰다.


/사진=이미지투데이

◆동대문운동장의 변천사
1926년 경성운동장이 준공된 후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노제(路祭)가 있었다. 종주국의 황태자 결혼기념시설에서 식민지 마지막 황제의 장례를 치렀다니 역사의 잔인함이 뼈에 사무친다.


경성운동장은 해방 후 서울운동장으로 이름을 바꿨다. 암살당한 몽양 여운형 선생(1947)과 백범 김구 주석(1949)의 장례식을 치르며 비운의 애국자를 애도하는 민족의 눈물이 뿌려진 곳이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찬탁과 반탁 세력이 집회를 열었는가 하면 좌익과 우익의 대규모 집회가 개최돼 격렬한 충돌이 일어난 을 일으킨 장소기도 했다. 또 1972년에는 브라질의 축구황제 펠레가 뛰었고 1960년대와 1970년대 고교야구 열풍에 이어 1983년에는 프로축구 슈퍼리그가 여기서 시작됐다.

1984년 9월 잠실운동장이 개장하면서 서울운동장은 동대문운동장으로 다시 이름을 바꿨다. 이후 슬럼화에 빠지자 서울시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파크’를 만들기로 하고 2007년 12월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했다. 당시 스포츠계에선 철거 반대 성명을 발표하는 등 반발이 심했다.

서울시는 동대문운동장 공원화사업을 위해 국제현상설계공모를 실시했다. 2007년 8월 이라크 출신 영국 여성 건축가인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환유(歡遊)의 풍경’이라는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우주선을 닮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건물이다.

하지만 이 건물을 볼 때마다 의구심이 든다. 설계자의 의도가 빛을 잃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600년 역사의 문화, 도시, 경제, 사회적 요소들을 하나로 통합해 환유의 공간으로 만들려는 시설치곤 주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느낌이다.


동대문운동장 발굴유적. /사진=뉴시스 노용헌 기자

◆사라진 성곽의 흔적을 추적하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는 옛 성곽이 어중간하게 복원돼있다. 그중에서도 성곽의 중간쯤에 있는 치성(雉城)이 눈길을 끈다. 공격하는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성벽을 돌출시켜 만든 시설이다. 여기 있는 것처럼 네모난 것이면 치성이고 원형이면 곡장(曲墻)이라고 한다.

이곳에 치성을 쌓은 이유는 도성 안에서 이 구간이 가장 낮아 방어 취약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흥인지문도 옹성을 쌓았고 흥인지문에서 광희문 남쪽에 이르는 구간에 5개 치성을 집중적으로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터의 중앙으로 나오면 동대문유구전시장이 있다. 하도감이 있던 자리다. 발굴 시 조선시대 건축물 유구를 그대로 보여준다. 다른 곳으로 옮겨 엄밀히 재현했다고 하지만 역사적 시설은 원래의 자리가 중요하다. 이전한 시설을 볼 때마다 씁쓸한 감회에 젖게 된다.

동대문유구전시장과 붙어있는 동대문역사관에는 동대문운동장에서 출토된 조선백자와 분청사기 등 조선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유물 1000여점이 전시됐다. 이것으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의 관람은 끝난다.

운동장 안에 불완전하게 복원된 멸실구간의 성곽은 산책로로 조성돼 공원 밖으로 이어진다. 길이는 123m. 이 구간은 동대문축구장이 있던 자리라 어설픈 복원구간은 동대문축구장을 가로지른다. 복원된 성곽은 공원 밖에서 왕복 4차선 도로와 만나며 끊긴다. 길 건너편은 한양공고 담장이다. 옛 경성도(京城圖)를 보면 이곳에 치성이 있었다. 이 점으로 미뤄볼 때 원래 성곽은 이곳에서 광희문 쪽으로 방향을 잡았을 것이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방향으로 100m쯤 가면 2009년 문을 연 동대문디자인플라자&파크 홍보관이 있다. 홍보관 건물을 지나 광희문 쪽으로 간다. 왕복 6차선의 왕십리길을 건너기 전 오른쪽으로 옛 서산부인과 건물이 보인다. 한국이 낳은 걸출한 건축가 고 김중업(金重業, 1922~1988)이 설계한 건물이다. 그는 한국의 전통미를 살리려고 노력한 한국 건축계의 선구자다.

그 건물 옆으로 서있는 건물들 사이에 불길에 그을린 듯 시커먼 성곽의 흔적이 보인다. 성곽이 끊긴 것은 애석하지만 앞으로의 성곽 복원에는 귀중한 길잡이가 될 것이라 믿으며 위안을 삼는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8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