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동대문의 남쪽으로는 성곽이 보이지 않는다. 옛 동대문운동장(현 DDP)에 이르기 전 성곽이 지나갔을 지점의 횡단보도에서 청계천 복원공사 때 만든 오간수문의 자취를 볼 수 있다. 하지만 폭이 좁아 다섯칸이 아닌 네칸만 표시해뒀다. 오간수문의 모조품은 다리 아래 제방에 만들었는데 보기에 민망하다. 원래 위치에 제대로 복원했으면 좋겠다.


조선시대에는 청계천을 개천(開川)이라고 불렀다. 개천은 토목공사에서 ‘작은 내나 개울을 넓히고 파낸다’는 의미다. 하지만 태종 때의 공사 후로 도성 안의 내명당수(內明堂水)를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됐다. 청계천은 일제강점기 이후의 이름이다.

폭이 좁고 수심이 낮은 개천을 대대적으로 넓힌 공사는 태종 12년이었고 당시엔 엄청난 규모였다. 그해 1월15일부터 2월15일까지 한달간 5만2800명의 인부가 동원됐고 64명이 공사 중 사망했다.

그로부터 9년 뒤 세종 3년 6월에 두차례의 홍수로 개천이 범람해 많은 수재민이 발생했다. 당시 세종은 신하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준천공사를 실시했다. 태종 때처럼 일시적인 대규모 공사 대신 세종 4년부터 16년까지 장장 12년에 걸쳐 농한기에만 소규모로 실시했다.


/사진=뉴시스 박세연 기자

이때 오간수문도 만들었다. 태조 때 지대가 낮은 동대문 부근에 두개의 수문을 만들었는데 북쪽에 삼간수문, 남쪽에는 이간수문을 설치했다. 신하들은 홍수에 대비해 수문을 한칸씩 더 늘리자고 했다. 하지만 실제 공사과정에서는 북쪽의 삼간수문만 두칸을 늘리고 남쪽의 이간수문은 그대로 뒀다.
인왕산과 백악산의 물줄기는 오간수문을 따라 청계천으로 흘러든다. 영조 때 청계천 준천공사를 하는 그림(水門上親臨觀役圖)을 보면 5개의 홍예수문을 쇠창살로 막아놓았다. 1900년대 사진에서도 여장을 갖추고 물가름석도 훼손되지 않은 견고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수문의 홍예는 예술품이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구조물이다. 둔중한 시설물임에도 냇물 위에 떠서 어딘가로 흘러가는 듯해 낭만적이었다. 하지만 그 수문은 도둑이나 죄인들이 도망가는 통로로 악용됐다. 청계천 복원 시 선조 때의 총통과 19세기 초의 상평통보가 발견된 것을 보면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다.

오간수문 밑을 흐르는 청계천을 바라본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천변에는 가마니때기로 칸을 막은 판잣집이 즐비했고 곧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당시엔 아낙네들이 천변에 앉아 방망이를 두드리며 빨래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였다. 그런 소박한 풍경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반세기가 흘렀다. 격세지감이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조성 중 발견된 서울성곽 기저부. /사진=뉴시스 노용헌 기자

◆임꺽정과 오간수문
“임꺽정이다.” 심야에 전옥서가 소란스러워졌다. 습격이었다. 횃불이 여기저기서 난무하고 함성이 들렸다. 그날 밤 임꺽정은 옥에 갇힌 가족을 구출해 청계천 쪽으로 도망갔다. 관군이 급히 뒤쫓았지만 그는 흥인지문 부근에서 종적을 감췄다. 주변을 샅샅이 뒤졌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오간수문으로 빠져나간 것이다. 이곳은 창살로 막혀 사람이 지나다닐 수 없지만 힘이 장사인 임꺽정에겐 무용지물이었다. 수문 뒤편 갖바치 마을에서 며칠 머물다 지금의 청계천 4가 쪽 배오개로 도망갔다.

임꺽정은 명종 때 화제가 된 백정 신분의 도둑이었다. 그러나 빈한한 백성을 괴롭히는 게 아니라 한양 북촌 등의 부잣집을 털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대도였다. 민심을 얻은 의적이어서 배오개 사람들이 그를 신고하지 않은 것이다.


이간수문. /사진제공=서울시

◆모습 드러낸 이간수문
청계천을 지나 도로를 건너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 이른다. 이벤트홀을 따라 오른쪽 밑으로 내려가면 복원된 성곽 밑에 이간수문이 원형 그대로 서 있다. 위로는 성곽이고 아래로는 수문이어서 성곽과 일체를 이룬다. 그 웅장한 모습을 볼 때면 마치 살아있는 선조를 대하는 기분이다.

지금은 철거됐지만 일제가 1924년 성곽을 허물어 1926년에 완성한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은 그 당시 동궁이었던 일본 황태자 히로히토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한 치욕의 시설이다. 결국 이간수문은 그 자리에서 무려 87년 동안이나 땅속에 묻혔다가 세상으로 나와 빛을 본 것이다.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받아 청계천으로 들어가게 하는 이간수문. 이간수문의 홍예는 밑 부분이 건재해 윗부분만 보수했다. 수문 바닥에는 바닥을 파이지 않게 하는 ‘장군석’이 있고 물이 들어오는 쪽의 두 홍예 사이에는 물줄기를 받아 두 수문으로 갈라져 들게 하는 물가름돌이 있다.

물가름돌은 바위를 연상케 할 만큼 큰 것으로 홍수에 홍예가 무너지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기능도 있다. 물가름돌과 장군석의 그 거무튀튀한 색깔은 세월의 풍상을 견디고 남았다는 징표로 친근감을 더해준다. 위쪽 홍예 안에 있는 목책은 요즘 만들어 세운 것이다. 홍예의 양쪽 석벽에는 목책을 받쳐주는 ‘장군목’을 끼웠던 자리가 분명하게 남아있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8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