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성장을 견인해온 제조업이 위기를 맞았다.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아 미국·독일·일본 등 주요선진국이 고부가 제조업으로 빠르게 변모하는 동안 변화의 물결을 외면한 탓이다. <머니S>가 창간 10주년을 맞아 한국 제조업을 긴급 진단했다. 제조업의 위기상황을 들여다보고 해법과 함께 희망 찾기에 나섰다. 제조업의 혁신을 주도하는 강소기업을 찾아보고 제조업의 뿌리인 소공인들의 새로운 시도를 조명했다. 전문가를 만나 한국 제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들어봤다.<편집자주>
서울 문래동 철공소 집적지역. 문래동 1~4가 및 인근 지역에 1300여 소공인업체가 모여있다. 1960년대부터 경인대로변을 중심으로 관련 소공인들이 모여들어 형성된 이곳은 쇠를 깎고 녹여 우리나라 제조업 곳곳에 부품과 소재를 공급하며 경제성장의 뿌리역할을 톡톡히 했다. 기술자들은 이곳에서 서로 경쟁하고 교류하며 기술발전을 이뤄냈고 “철로 된 것은 무엇이든 만드는 곳”으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급격한 산업구조의 변화는 문래동에 가장 먼저 영향을 끼쳤다. 제조업 최대호황기를 거치고 경기침체가 찾아오며 우리나라 제조업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기업 생산제품들이 모듈화·대량화되고 중국산 저가제품의 공세가 몰아치면서 수십년간 금속을 다뤄온 문래동 장인들은 일감과 함께 자신감도 잃고 있다.
문래동 철공소. /사진=최윤신 기자
문래동 철공소. /사진=최윤신 기자
◆규모의 경제에 밀려난 기술장인들
지난 9월6일 문래동 철공소 집적지역을 찾았다. 1호선 신도림역에서 내려 도림천을 건너 10분여를 걸으니 낡은 철공소 간판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추적추적 비가 내려서인지 철공소가 밀집한 골목은 대낮임에도 분위기가 스산했다. 철을 자르고 갈아내는 굉음이 거리 곳곳에 울려 퍼지지만 어쩐지 구슬프게 들렸다. 평일 오후임에도 상당수 점포는 가게 문을 닫은 상태였고 거리를 거니는 사람을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이따금씩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누비는 사람들은 철공소 지역에 형성된 예술촌 거리를 둘러보려는 관광객이다. 2000년대 들어 철공소를 떠나는 사람이 생겼고 저렴한 임대료를 좇아 예술가들이 몰리면서 예술촌이 생겨났다.
골목에 위치한 식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음에도 손님은 한명뿐이었다. 식당 사장은 “몇년 전만 해도 점심시간엔 바빠서 4명이 일했는데 점점 손님이 줄어 이제는 2명이 일해도 한가하다”고 말했다.
문을 연 점포 안에선 소공인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혼자였다. 일감이 없어서인지 하릴 없이 TV를 보거나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많았다.
일감이 감소한 것은 전자기기와 자동차 등에 영세업체가 공급할 수 있는 여력이 줄어들면서다. 수요가 많은 부품은 규격을 표준화해 중국에서 대규모로 생산하는 게 일반화됐다. 많은 생산공장이 중국으로 이전한 것도 영향을 끼쳤다.
정밀금속가공업체 사장 A씨는 “상당수 업체가 생산설비 소모품 등의 금속가공제품을 공급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며 “정기적인 일감을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은 살 길을 찾아 문래동을 떠났다”고 말했다.
일감만 부족한 게 아니다. 인력도 부족하다. 어쩌다 일감이 들어와도 인력이 부족해 맡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파이프 가공업체 사장 B씨는 “일감이 떨어진 것도 문제지만 혼자서 일하다 보니 많은 물량을 다룰 수가 없다”며 “모든 물가가 올랐는데 철가공업종의 인건비는 전혀 오르지 않아 일하려는 사람이 없다”고 한탄했다.
문래 소공인 특화지원센터. /사진=최윤신 기자
문래 소공인 특화지원센터. /사진=최윤신 기자
◆ ‘문래 머시닝밸리’서 찾는 새 희망
수년째 불황에 허덕이며 희망을 잃은 문래동 철공단지지만 이곳에서 제조업 뿌리산업의 새로운 희망이 피어나는 현장도 볼 수 있었다. 경인로79길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일변했다. 다른 풍경은 비슷했지만 동일한 규격에 깔끔하게 정비된 간판이 거리의 분위기를 확연히 바꿔놨다.
이런 변화를 이끈 것은 경인대로변에 위치한 문래소공인특화지원센터다. 생기를 잃어가는 이 지역에 혁신을 불어넣겠다는 목표로 2013년 중소기업청이 설립해 한국소공인진흥협회가 위탁운영 중이다.
센터의 목표는 이 지역의 숙련된 장인들의 기술력을 기반으로 연구개발과 마케팅을 지원해 ‘세계적인 시제품 제작 집적지’로 거듭나게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문래 머시닝밸리’ 프로젝트다. 50여개사가 참여하는 시제품제작 전문가그룹을 구성해 이미 시제품 수주성과를 내고 있다.
상주 직원인 이호준 선임 매니저는 “문래 머시닝밸리 최고의 장점은 기계금속과 관련해 뛰어난 기술력을 갖춘 공업소가 한곳에 모였다는 것”이라며 “이 장점을 십분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센터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문래동의 쇠퇴 원인은 기술력이 아니다. 이 지역의 소공인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갖췄다. 하지만 영세한 탓에 규모의 경제에 밀려 현재의 위기가 찾아왔다. 문래 머시닝밸리는 규모의 경제와 차별화된 문래동의 작은 업체만 할 수 있는 고부가가치를 찾아낸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센터는 우선 소공인들의 교육에 역량을 쏟고 있다. 소공인 경영대학과정을 마련해 기술과 생산에만 매진했던 소공인들이 경영을 이해하도록 돕고 컴퓨터 지원설계(CAD) 등 기술교육도 실시 중이다. 센터 2층에 위치한 강의실에는 교육을 받는 소공인들의 책이 놓여있다. 빼곡히 적힌 공부의 흔적이 이들의 열정을 짐작케 한다.
이밖에 억대에 달하는 3D프린터를 센터에서 구매해 소공인들이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법률·노무·세무를 비롯해 국내외 바이어와 연결하는 일까지 전분야에서 업무를 지원한다.
이미 상당수 업체가 센터의 지원을 통해 활기를 되찾았다. 28년째 문래동에서 일해온 이승준 한빛테크랩(한빛정밀) 대표는 “센터에서 연결해주는 시제품 수주와 교육에서 배운 블로그로 수주받는 일감이 전체의 3분의2에 달한다”며 “IMF 외환위기 이후 지속적으로 침체일변도였는데 각종 교육과 지원사업을 통해 많은 업체가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추석합본호(제507호·제50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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