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백범광장 서쪽에는 상하이임시정부 재무총장과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 선생의 동상이 있다. 이시영 선생은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한 이회영 선생의 동생이다. 이처럼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항일투사의 동상과 기념관·광장이 들어섰다. 일제식민지배의 상징을 대체하기 위함이다.
백범광장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신궁 중광장 자리였다. 이승만 정권 때 국회의사당 부지를 조성하면서 현재와 같이 넓어졌다. 백범동상 자리 서남쪽에는 1963년 7월 조개껍질 모양의 야외음악당을 세웠지만 소음공해 민원이 이어지다가 1980년 5월 신군부에 의해 철거됐다. 지금은 광장이 잔디밭으로 꾸며졌다.
◆되살아난 숭례문
백범광장 끝에서 바로 아래에 있는 아동광장으로 내려간다. 언제부턴가 아동광장의 모자상 같은 상징물들이 없어졌는데 이유를 알지 못한다. 대신 아동광장에 어울리지 않게 김유신 장군의 동상이 서 있다. 광장 한구석에 있어 잘 보이지도 않는다. 아동광장 밑에는 조선신궁 하광장이 있었다.
일제는 하광장에서 남대문까지 조선신궁 참배로를 조성했다. 현재 소월로의 시작이다. 복원된 성곽은 아동광장을 감싸고 원을 그리듯 이어진다. 광장 안 오른쪽으로 길을 따라 내려오면 소파길과 마주한 도동삼거리를 만난다. 소파길을 지나 다시 소월길을 건넌다. SK남산빌딩에서 소월길을 따라 숭례문으로 내려가는 길 왼쪽에 한양도성의 성곽이 있다. 이 부근의 성곽은 성 안팎으로 여장과 체성이 온전한 모습이다. 이 구간을 지나면 숭례문까지 성곽의 흔적이 사라진다. 아쉬움을 감추며 곧 숭례문에 다다른다.
2008년 화재로 문루 2층을 보수한 숭례문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단청이 화려하다. 숭례문은 한양도성의 남대문이고 정문이며 도성의 얼굴이다. 태조 5년(1396년)에 짓기 시작해 태조 7년(1398년)에 완공했다. 이후 세종 30년(1448년)과 성종 10년(1479년) 2차례에 걸쳐 개축했다. 1899년(고종 36년·광무3) 시내에 전차를 개통하면서 숭례문 일대 성곽 일부분을 헐어버렸다. 본격적인 성벽 철거는 1907년 9월(융희 원년)이었다. 그해 10월 조선을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다이쇼천황의 본명)가 숭례문 홍예 안으로 들어오기 싫다는 이유로 숭례문 북쪽 성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숭례문 밖 ‘남지’(南池)도 메웠다.
숭례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건물로 석축기단 위에 전돌로 쌓은 여장을 두르고 동서 양쪽에 협문을 한개씩 두고 계단으로 오르내리게 했다. 흥인지문과 같이 문루가 2층이다. 공포는 내외포를 전부 이출목(二出目)으로 했으며 지붕은 우진각이다. 편액은 양녕대군이 세자 때 쓴 것이라고 한다. 2008년 2월10일 방화로 2층 문루가 불에 탔지만 2013년 5월 복구공사를 마쳤다.
숭례문과 흥인문은 대종을 달아 밤 10시 인정(人定)에 28번을 치고, 새벽 4시 파루(罷漏)에 33번을 쳐서 도성 안팎의 사람들에게 출입시간을 알렸다. 인정에 28번을 치는 것은 28수(二十八宿)의 별자리에 밤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것이며 새벽4시 파루에 33번 종을 치는 것은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삼십삼천(三十三天)에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한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것이다.
◆관악산의 화기를 막아라
경복궁의 화재설을 더 알아보자. 관악산은 경복궁 남쪽으로 보이는 외사산이다. 관악산을 멀리서 보면 산기슭부터 산등성이로 이어지는 작은 봉우리들이 마치 불타는 화염과 같다. 그 화인이 경복궁을 위협한다는 풍수지리설은 조선 초부터 회자됐다.
어떤 장치로 관악산의 화기를 막으려했을까. 예로부터 6가지의 장치를 고안했다. 첫째는 한강이다. 한강의 물로 건너오는 불을 끈다. 둘째는 남대문 밖 남지다. 남지의 물로 도성 안으로 들어오려는 불을 끈다. 남지는 중종 때 김안로의 발의로 조성됐다고 전해지는데 연꽃이 만발해 연지(蓮池)라고도 불렀다. 셋째는 숭례문의 현판이다. 사대문과 사소문 중 유일하게 세로로 걸린 현판은 숭례문 현판뿐이다. 숭례문의 ‘례’(禮)자는 오행(五行)에서 불을 의미하고 ‘숭례’(崇禮) 두 글자를 세로로 쓰면 불이 타오르는 모양이어서 이 글자의 화기로 막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화치화(以火治火)의 방법이다.
넷째는 조선시대 숭례문에서 광화문으로 들어오는 도로를 똑바로 내지 않고 지금의 남대문로를 따라 종루, 즉 현재의 보신각까지 우회하도록 도로를 냈다. 고종이 덕수궁으로 이어하기 전까지 태평로는 아주 작은 길이었다. 불길의 직진을 막기 위해서였을까. 우회도로를 따라 살아남은 불씨는 다섯째로 개천(開川·현재의 청계천)에서 막힌다. 개천을 건넌 화마는 광화문에 이르러 마지막 여섯째로 광화문 양쪽의 해치에 의해 진화된다는 설이다. 해치는 화마를 막는 전설의 동물이다. 그럼에도 경복궁은 수차례의 화마를 피할 수 없었다. 무학대사의 예언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 같은 6가지 장치는 어디까지나 속설로 회자됐다. 이 가운데서도 숭례문 현판의 세로쓰기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 말하자면 세로쓰기의 이유를 숭례문이 지닌 본래의 뜻에서 찾는 것이다. 숭례문은 도성의 정문과 같아 예의를 존중하는 모습으로 현판을 세워 걸었다는 설이다. 특히 당시 종주국인 중국 사신들이 주로 출입했던 성문으로서 귀한 손님을 예의를 갖춰 맞는 의미에서 세로로 세웠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은 건물의 구조 또는 외관상 현판을 가로보다 세로로 세워 수평형 건물에 수직성의 장엄미를 가미했다는 설이다. 조선 초의 건축가들은 600여년 전에 벌써 현대회화에서 보는 바와 같은 세련된 미의식을 가졌던 것이다.
☞ 본 기사는 <머니S> 추석합본호(제507호·제50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