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는 사대부가 부리는 사노비의 비중이 컸던 시기다. 그 중 외거노비는 주인을 위해 일하지만 따로 거주하며 가정을 꾸릴 수 있었고 일과 후에는 집으로 퇴근할 수도 있었다.

수백년 전 노비 이야기를 굳이 꺼낸 이유는 외거노비보다 못한 근무환경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어서다. 2017년 대한민국의 게임업계 종사자들이 누리지 못하는 퇴근이라는 ‘호사’를 조선시대 노비도 만끽했다.


최근 국정감사를 통해 게임업계의 초과근로가 또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난 12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감 자리에서 신창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서장원 넷마블게임즈 부사장을 참고인으로 불러 넷마블과 업계의 초과근무 관행을 지적했다.

넷마블은 지난해 7월 계열사 직원이 돌연사한 데 이어 11월에도 자회사 넷마블네오 직원 A씨가 급성심근경색으로 사망하면서 과로사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이를 두고 지난 6월 근로복지공단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A씨가 업무상 사유에 의해 사망했다”며 과로로 인한 사고라고 판단했다.

게임업계 종사자들의 고강도 노동 논란은 이전에도 줄곧 제기됐다. 출시 전 업무강도를 바짝 끌어올리는 ‘크런치모드’가 특히 유명하다. ‘행동을 개시할 시간’이라는 숙어에서 나온 이 말은 야근과 철야 일정을 소화하며 출시일 직전까지 온 직원이 업무에 집중하는 기간을 일컫는다. 짧게는 한두달, 길게는 6개월 이상 계속되는 크런치모드에 돌입하면 상당수의 직원이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한 채 회사에서 쪽잠을 잔다.


게임업체가 직원의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크런치모드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크런치모드 없이는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게임업계 한 관계자는 “일부 임원진 가운데 크런치모드를 해야 재미있는 게임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수 있다”고 말해 업계 전반에 크런치모드가 뿌리깊게 자리잡았음을 시사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게임은 일을 많이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미국 스탠포드대학의 연구 결과 주당 근무시간이 50시간을 넘을 경우 생산성이 떨어지기 시작해 55시간을 넘으면 급격히 추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 게이오대학도 연구를 통해 주당 근무시간이 25시간을 넘어서면 인지기능이 낮아지고 40시간 이후에는 큰폭으로 하락한다는 결과를 내놨다. 크런치모드가 직원의 건강과 게임의 완성도 모두를 망치는 셈이다.

게임은 창의력의 산물이다. 개발자들을 회사에 가둬놓고 창의적인 결과물을 내놓으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한 게임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창의적이고 즐거운 게임은 개발자의 자유로운 사고에서 나온다. 퇴근을 막고 직원을 갈아넣어 만든 게임이 재미있겠는가.”

☞ 본 기사는 <머니S> 제511호(2017년 10월25~31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