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이 살기 힘든 나라 한국. 전체 노인의 과반가량이 빈곤에 시달리고 행복한 노후에 대한 기대치도 낮다. 반면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고령사회를 겪은 선진국 중에선 ‘노인이 행복한 나라’로 평가받는 나라도 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머니S>가 노후 선진국의 특별한 노하우를 살펴봤다. 독일과 일본을 찾아 행복한 노후의 비결을 들었다. 또 전문가를 만나 이상적인 복지국가로 가기 위한 길을 물었다.<편집자주>
“어떤 노후보장정책이 떠오르나요?” 우리 국민에게 이 같은 질문을 하면 국민연금이나 지하철 무료 승차 등 대표적인 몇가지 정책을 언급하겠지만 독일에서는 명확한 답을 듣기가 어렵다. 노후를 걱정할 필요가 없을 만큼 생활 속에 다양한 시스템이 녹아있는데 특별한 정책을 알려달라는 건 말문이 막히는 ‘우문’일 뿐이다. 독일의 정책은 한가지. 행복한 노후를 보장하는 것뿐이다.
국제 노인인권단체 헬프에이지가 96개국에서 진행한 노인복지 설문 ‘2015 글로벌에이지와치’ 조사결과에 따르면한국은 60위로 4위인 독일과 엄청난 격차를 보였다. 옆 나라 일본은 8위에 이름을 올렸다. 문제는 이 같은 격차가 더 벌어졌다는 점이다. 2013년 조사결과와 비교하면 독일과 일본이 한계단씩 상승하는 동안 우리나라는 오히려 10위나 하락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으로서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독일의 복지정책, 뭐가 다를까
일반적으로 우리가 바라보는 독일의 노후복지는 스웨덴 등 유럽의 여타 복지선진국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묘한 차이가 있다. 핵심은 나라가 모든 것을 책임지는 게 아니라 국민 스스로 노후를 대비할 ‘평등한 기회’를 주는 것.
독일의 연방 헌법은 독일을 민주주의 사회 연방국가로 정의한다. 사회보장제도가 국민이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국민은 스스로 일자리를 찾아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원칙이 깔렸다. 물고기를 대신 잡아주는 것보다 물고기 잡는 방법을 ‘공평하게’ 가르치는 데 힘을 쏟는다는 얘기다.
우리나라 국민의 노후가 궁핍한 것은 성인이 된 자녀를 경제적으로 계속 도와줄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 탓이 크다. 학교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사교육 등으로 다양한 곳에 돈을 쓰고 나면 대학교 등록금이라는 거대한 벽을 마주한다. 저렴한 이자의 학자금 장기대출로 간신히 벽을 넘어도 더 큰 벽이 기다린다. 취업 이후 빚을 모두 갚을 때쯤이면 결혼을 고민할 나이가 되는데 부모의 도움 없이 집을 마련하는 건 그야말로 꿈일 뿐이다.
결국 자녀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은 우리네 부모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노후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자녀의 성공에 투자하는 개념이어서 이른바 ‘총알’의 양에 따라 사회의 양극화가 대물림되는 상황이다.
반면 독일은 아이를 나라(연방정부)가 키운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지원정책이 마련됐다. 가족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소득수준과 관계없이 지원한다. 심지어 외국인도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우리나라는 아이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영어나 체육 등 각종 사교육을 시작한다. 교육비를 얼마나 쓰느냐에 따라 선행학습이 이뤄지고 다른 아이와 차이가 생기는 것을 기뻐한다.
반면 ‘균등한 기회’와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는 독일에서는 선행학습이 금지된다. 모든 교육은 기관의 커리큘럼에 따라 진행해야 한다. 아이의 발달과정에 맞춰서 맞춤형 교육이 이뤄지는데 선행학습을 한 경우 다른 아이의 자존감에 상처를 주고 기회를 박탈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말 뛰어난 영재로 판단될 경우 테스트를 거쳐 특수교육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나아가 486개 대학교가 공짜다. 따라서 부모들은 사교육에 열을 올릴 필요가 없으니 불필요한 지출이 줄어든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난 한인사업가 정성락 HR카라 대표는 “독일은 가정형편과 관계없이 공평한 교육기회를 제공한다”면서 “천연자원에 의존하는 경제구조가 아니어서 인적자원에 투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취업 보장, 스스로 노후 챙긴다
독일의 실업률은 해마다 낮아지는 중이다. 코트라에 따르면 2012년 독일의 실업률은 6.8%였지만 2015년 4.6%, 지난해 4.1%로 꾸준히 줄었다. 이는 취업을 보장해 스스로를 챙길 기회를 주기 위한 정부의 노력 덕분이다.
정 대표는 “노후생활에 필요한 비용 중 절반은 의료비고 나머지 대부분은 주거비인데 정부가 의료비를 책임진다”면서 “직장에 다닐 때는 일정부분 자기부담금이 있지만 은퇴 후엔 그마저도 사라진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스스로를 챙기기 어려울 경우 사회가 뒷받침해주는 구조라 정부는 최대한 취업기간을 늘리는 데 집중한다”고 덧붙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일이 적은 만큼 젊어서 번 돈으로 만족스런 노후생활을 보낼 수 있다는 설명이다. 독일에서는 요양원에 가는 노인이 많은데 대부분 연금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즐긴다. 여기저기 오랜 기간 휴양지를 찾아 여행 다니는 노인들도 마찬가지. 또 어려서부터 공동체문화를 배우고 접했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도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무엇이든 함께 즐기려는 분위기도 독일 노후생활의 특징으로 꼽힌다.
우리나라의 국민연금은 자신이 낸 만큼 노후에 돌려받는 개념이다. 하지만 독일은 현재 취업자가 낸 돈이 바로 노년층의 연금으로 지급된다. 이 과정에서 세대 간 갈등이 생기기도 하지만 이를 조율하는 게 정부의 역할이다. 따라서 연금생활자 수에 맞춰서 일정한 취업자 수를 유지하는 게 우선과제일 수밖에 없다.
독일에서 태어난 한 교민은 “40%에 육박하는 세금을 어떻게 내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지만 내가 낸 세금으로 아이들과 내 노후를 책임진다는 믿음이 있다”면서 “어린 시절 이미 다양한 혜택을 체험했기에 나이가 들어서도 걱정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한국이 독일처럼 바뀌려면 수당 비율을 낮추면서 사회적 합의가 수반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원동력은 '선순환의 에너지'
독일은 ‘사회적 시장경제’를 표방한다. 경제질서를 사회질서의 일부분으로 간주하며 자유·평등·인권이라는 민주주의 목표에 부합하도록 노력한다. ▲열심히 일한 사람이 노후를 걱정해선 안되고 ▲아파도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일이 없어야 하고 ▲일자리를 잃어서 당장 먹고 살 일을 걱정해선 안된다는 기본 원칙이 굳건히 세워졌다. 이는 통일 독일을 일으킨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최근 독일의 알렌바흐연구소 조사결과에 따르면 외로움을 느끼는 독일 노인은 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와 달리 대도시가 없고 중소도시가 대부분인 특성도 공동체문화가 구축된 배경이다. 도시 근교에는 수많은 공용 스포츠시설이 자리해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다.
어려서부터 인내와 양보를 통해 인격체에 대한 존중을 배우고 성장과정에서 신뢰와 약속을 우선시하는 독일의 교육. 오래도록 일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일깨우는 취업정책에다 ‘함께’라는 공동체의식이 국민의 머릿속에 각인돼 선순환의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점이 독일의 가장 큰 강점이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11호(2017년 10월25~31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