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전경. /사진=이미지투데이

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강북삼성병원의 경교장에서 나오면 성곽탐방길은 교남동 송월길을 따라 월암근린공원으로 이어진다. 북쪽으로 올라가면 서울시교육청이 나온다. 그곳은 원래 경희궁(慶熙宮)의 후원이었는데 서울시교육청이 1968년 12월30일 새 청사를 지었다.

경희궁의 원래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었다. 광해군 9년(1617년) 창건 때 유사시에 왕이 피난할 이궁(離宮)으로 지었으나 규모가 크고 여러 임금이 이 궁에서 정사를 펼치면서 동궐인 창덕궁을 서궐이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에 경희궁을 허물고 그 자리에 경성중학교를 세웠으며 해방 후에는 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섰다. 경희궁터는 사적 제271호로 지정됐고 1980년 서울고등학교가 서초구로 이전한 다음부터 점진적으로 궁을 복원 중이다. 현재 정문인 흥화문, 정전인 숭정전, 편전인 자정전, 영조의 어진을 모셨던 태령전, 금천교 등이 복원됐다.

경희궁의 궁궐은 일제가 파괴했고 그 후원은 군사정권의 군홧발에 짓밟혔다. 또 서울시교육청을 지으면서 교육청 남쪽 담장을 따라 쌓은 성곽마저 헐어버렸다. 군인들의 눈에는 문화유산의 가치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최초의 근대식 기상관측소


옛 기상청 건물. /사진제공=허창무 한양도성 해설가


서울시교육청 위로 올라가면 옛 기상청으로 통하는 문이 나온다. 그곳을 지나 정상까지 올라가면 1932년 3월 준공된 옛 경성측후소 건물이 나타난다. 그곳도 인왕산 능선에 자리 잡은 경희궁의 후원이었는데 일제는 그 숲을 파괴해 측후소건물을 지었다. 일제는 1919년부터 이곳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기상관측소를 세웠고 1932년 3월에는 그 옆자리에 기상측후소를 세웠다.
1904년. 부산, 인천, 목포 등지에 기상관측소를 설치해 근대적인 기상업무를 시작했다. 서울에는 1907년 10월1일 정동에 경성측후소를 설치했고 그로부터 24년 5개월 뒤 정동의 경성측후소를 현재의 송월동 월암공원 위로 옮겨왔다.


측후소를 송월동으로 이전할 때 그 마을에는 약 200호에 이르는 토착민들이 살았는데 현재 아현동 일대로 강제 이주됐다고 한다. 어느 시대나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은 부평초처럼 흘러 다니거나 개돼지처럼 쫓겨 다니기 십상이다.

광복 후 경성측후소는 중앙기상대로 이름을 바꿨다. 1990년 12월에는 중앙기상대에서 기상청으로 승격했고 1998년에는 신대방동에 신청사를 마련, 이전했다. 그러나 송월동 1번지 기상관측소에서 측정한 기상측정치가 지난 65년 동안 서울의 표준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이곳은 ‘기상청 서울관측소’와 ‘서울황사감시센터’라는 이름으로 관측을 이어가는 중이다. 아울러 이 자리에는 2005년 설립된 ‘한국기상산업진흥원’이 자리한다.

옛 경성관측소 건물은 일제 때 모습을 일부 간직하는데 궁륭의 창문이며 건물 중앙에 원형의 탑을 세운 게 특징이다. 이 같은 모양은 일제강점기 전국 주요 측후소 건물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원통형 탑의 꼭대기 부분에 열주를 세운 듯 마감한 부분이 로마 콜로세움이나 피사의 사탑 같은 느낌을 준다. 해방 후 1960년에 완공한 옛 기상청건물은 지금의 주차장 터에 있었지만 지금은 철거됐다. 현재 서울복지재단 건물로 사용되는 건물은 1975년에 준공된 기상연구소다.

◆월암근린공원

옛 기상청 정문에서 서쪽으로 가면 사거리가 나오고 여기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옛 기상청 담장을 따라 거뭇거뭇한 성곽의 잔재가 보인다. 그동안 옛 기상청건물을 둘러싼 주택에 묻혔다가 주택이 철거되며 모습이 드러났다. 그것은 월암공원부터 언덕 위로 이어진다.

월암공원은 2008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2009년에 완공했다. 공원이름은 이 근처 송월동 3-1 바위에 새겨진 ‘월암동’(月巖洞)이라는 이름을 따 지었다. 조선시대 지금의 송월동(松月洞)은 월암동이었다.

월암공원을 조성할 때만 해도 문화재 복원에 대한 인식이 생겨 가급적 성곽의 유구를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을 택했다. 단순히 외양 위주의 복원이 아니라 지난세월의 흔적을 살리는 복원이었다. 한단밖에 남아있지 않은 성곽이라도 그대로 살리고 그 위에 현대판 성돌을 쌓아올렸다. 그래서 월암공원 성곽길은 세월에 따라 변한 흔적이 뚜렷하다. 멀리는 태조 때와 세종 때의 축성법, 가깝게는 숙종 때의 축성법을 살펴볼 수 있다.

자연석을 그대로 쌓거나 대충 가공해 쌓고 성돌과 성돌 사이의 성긴 부분에 작은 돌을 메워 쌓은 태조 때의 축성법과 맨 아래에 큰 장대석을 놓고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몽돌을 쌓아 멀리서 보면 옥수수알맹이처럼 보이는 세종 때의 축성법. 면석을 완전히 규격화해 정방형에 가까운 성돌을 빈틈없이 쌓은 숙종 때의 축성법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태조 때와 세종 때는 성벽에 물매를 줬다. 성벽 뒤에 채워 넣은 토석의 압력을 버티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성벽의 기울기는 태조 때에 심했다. 보통 77도쯤이었으나 전체를 석성으로 개축한 세종 때는 물매를 줄였고 숙종 때는 수직으로 쌓았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20호(2017년 12월27일~2018년 1월2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