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굴뚝산업’이었던 자동차산업이 본격적인 패러다임 변화를 마주하고 새롭게 펼쳐지는 ‘굴뚝 없는’ 미래에 대비하는 분위기다. 완성차 기업은 전기차 시장의 절대 강자 테슬라를 상대하며 고전했지만 현재는 테슬라가 오히려 압박을 받는 모양새다. /사진=각 사, 그래픽=김은옥 기자
전기자동차 시장이 뜨거워지고 있다. 시장조사업체인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글로벌 전기차 판매량은 지난해보다 40% 이상 성장한 약 688만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글로벌 완성차 기업은 “내연기관차의 미래는 없다”며 전기차 전환을 잇따라 선언하고 있다. 전통적인 ‘굴뚝산업’이었던 자동차산업이 본격적인 패러다임 변화를 마주하고 새롭게 펼쳐지는 ‘굴뚝 없는’ 미래에 대비하는 분위기다. 완성차 기업은 전기차 시장의 절대 강자 테슬라를 상대하며 고전했지만 현재는 테슬라가 오히려 압박을 받는 모양새다. 테슬라를 따돌리고 전통의 완성차 기업이 승기를 잡을지 귀추가 주목되는 가운데 전기차 패권의 향방을 조명해봤다.
테슬라의 ‘메기 효과’… 잠자던 완성차들을 깨웠다
설계부터 생산방식까지 싹 갈아엎은 ‘전기차 전용 플랫폼’ 경쟁 시작
(사진 위부터 시계방향) 쉐보레 볼트 EUV, 벤츠 EQA, 폭스바겐 ID.4 생산공장 /사진제공=각 사
반응은 뜨거웠다. 최근 잇따른 전기차 화재사고에도 일단 계약부터 하자는 식이다. 현대자동차가 지난달 23일 공개한 ‘아이오닉5’는 사전계약 실시 하루 만에 2만3760대의 실적을 올리며 한국 자동차 역사를 새로 썼다.

업계는 지난해 출시된 기아 4세대 카니발의 사전계약 첫날 실적인 2만3006대 기록을 전기차가 갈아치운 점에 주목하고 있다. 아이오닉5는 유럽에서도 3000대 한정 판매분이 이미 동났다. 현대가 올 한해 판매 목표로 제시한 2만6500대는 이미 달성한 만큼 “국내 전기차 보조금을 싹쓸이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다. 올해 정부가 예고한 승용 전기차 보조금은 약 7만5000대분이다.
지난해 국내 전기차 판매 비중이 약 2.5%인 점을 고려할 때 이 같은 반응은 이례적이란 분석이다. 현대기아차는 지난해 내수 시장에서 ▲코나 일렉트릭 ▲아이오닉 일렉트릭 ▲니로EV ▲포터EV ▲봉고EV 등을 합해 모두 2만7548대를 판매했다. 아이오닉5의 파괴력을 다시금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아이오닉5 돌풍에 테슬라 긴장했나

아이오닉5가 각광받으며 테슬라와의 비교도 이어지고 있다. 테슬라는 글로벌 전기차 시장 점유율 23%를 차지하는 절대강자다. 2020년 국내 판매량은 1만1829대로 2019년의 2430대와 비교해 판매가 7배 이상 늘었고 2018년 585대보다는 무려 20배 이상 성장했다. 2019년까지는 모델S와 모델X 등 가격이 비싼 2개 차종만 판매했지만 지난해 보급형인 ‘모델3’ 출시 이후 판매량이 급증했다.


하지만 테슬라는 지난달 아이오닉5의 출시 직전 5999만원으로 ‘모델Y’ 최하위 트림의 사전계약을 받다가 갑자기 이를 중단하고 상위 트림만 판매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모델Y 기본형의 짧은 주행거리 탓이다.

업계에선 아이오닉5가 테슬라 독주에 제동을 걸었다는 평이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과 교수는 “완성도 높은 아이오닉5가 테슬라 독주에 제동을 건 셈”이라며 “앞으로 전용 플랫폼을 통해 다양한 차종이 쏟아질 것이란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소비자 반응이 폭발적인 것은 상품성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하고 첫 차가 성공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점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덧붙였다.

아이오닉5는 겉보기엔 준중형차 수준이지만 3m가 넘는 휠베이스로 중대형차 수준의 실내공간을 갖춘 점 등이 관심을 모았다. 장재훈 현대자동차 사장은 지난달 아이오닉5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고객이 비교하고 선택하는 관점에서 기준이 돼야 한다”며 “전기차 전용 플랫폼을 가진 것은 흔하지 않다는 것이고 그것을 실제 입증하는 차가 아이오닉5”라고 강조했다.

파예즈 라만 현대차그룹 차량아키텍처개발센터장(전무)은 “안전은 아이오닉5를 개발하며 가장 최우선 순위에 뒀던 부분”이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운전자와 동승객, 배터리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엔지니어들이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HMGICS 조감도 /사진제공= 현대차그룹
◆겉은 작지만 속은 넓게… 전용 플랫폼의 힘

업계에선 아이오닉5의 인기 비결을 두고 전기차만을 위한 유연한 설계 및 생산방식인 ‘전용 플랫폼’ 때문으로 해석한다. 플랫폼은 엔진과 변속기 등 자동차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를 담는 일종의 그릇이다. 일부 업체는 구성 방식을 뜻하는 ‘아키텍처’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그동안 완성차업체는 기존 자동차 제조방식을 고수하며 엔진과 변속기 등 전통적인 구동장치가 들어가는 내연기관차의 뼈대를 활용해 전기차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테슬라는 이 같은 방식을 과감히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전달하는 데 집중했고 그 결과 전기차 시장의 패권을 거머쥔 상태다.

이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던 자동차업체는 기존 제품의 한계를 뛰어넘으면서도 그동안 해온 대량생산방식의 강점을 살리기 위한 방책으로 전기차 전용 플랫폼 카드를 꺼냈다. 특히 모듈형 전기차 전용 플랫폼에선 차체 구조 등 기존의 틀을 깨면서도 성능 향상과 원가 절감이라는 목표를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같은 전용 플랫폼을 통해 탑승자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효용은 넓은 실내공간이다. 배터리를 차체 바닥에 배치하고 엔진과 변속기 등 부피가 큰 부품이 차지하던 공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 그 결과 범퍼 끝에서 바퀴의 중심축까지의 거리(오버행)가 줄고 앞바퀴와 뒷바퀴 사이 거리인 휠베이스(축거)가 늘어난다. 차체 크기는 준중형급이어도 대형차급의 탑승 공간을 만들 수 있게 되는 것. 필요에 따라 SUV(스포츠유틸리티차)나 미니밴 등으로 변형이 쉬운 것도 장점이다.

이런 이유로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는 전기차 시대를 대비하기 위한 전용 플랫폼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최근 현대차그룹의 ‘E-GMP’와 폭스바겐의 ‘MEB’ 외에도 제너럴모터스(GM) ‘얼티움’이 대표적인 전기차용 모듈형 플랫폼이며 PSA그룹의 ‘eVMP’나 메르세데스-벤츠 ‘EVA2’ 등도 주요 전기차 전용 플랫폼으로 꼽힌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테슬라가 메기 효과로 자동차업계에 자극을 줬고 이를 통해 혁신의 바람을 몰고 온 것도 사실”이라며 “빠른 변화만큼 달라진 생산체계가 필요하고 노·사문제를 비롯해 기술적인 변화 수준에 걸맞은 제도상의 변화도 함께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하지만 앞으로 테슬라의 기능을 다른 회사가 추격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자동차회사가 어찌 될지는 불확실하다”며 “자동차 본연의 역할이 더 중요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업계는 앞으로 완성차업체의 공세가 본격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국산차업체 한 관계자는 “유연한 생산 시스템을 갖춘 만큼 시장 수요에 맞춘 빠른 대응이 가능해졌다”며 “특히 독일 등 유럽 주요 자동차 생산국이 정부 지원에 힘입어 공장부터 친환경으로 탈바꿈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폭스바겐 아우토슈타트는 현대차그룹이 혁신센터의 벤치마킹 모델로 삼았다 /사진=로이터

◆입지 좁아지는 테슬라

아이오닉5 이후 올해 국내 출시를 예고한 전기차 중 가장 관심을 끄는 건 기아의 ‘CV’다. E-GMP가 적용된 기아의 첫 차종이면서 아이오닉5보다 뛰어난 주행성능에 주안점을 둘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민첩한 가속력은 물론 한 번 충전으로 가능한 최대 주행거리가 500㎞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지엠은 최근 북미에서 선보인 ‘볼트EV’ 부분변경 모델과 ‘볼트EUV’를 연내 출시할 계획이다. 볼트EUV는 GM이 처음 선보이는 전기 SUV인 만큼 관심을 끈다. 르노삼성은 지난해 유럽에서 10만대 넘게 팔린 전기 해치백 차종인 ‘르노 조에’에 집중하고 있으며 쌍용차는 올해 코란도 기반 전기차 ‘E100’을 출시할 예정이다.
벤츠는 소형 전기차 ‘EQA’를 연내 출시하고 플래그십 세단 ‘S클래스’의 전기차 버전인 ‘EQS’도 소개할 계획이다. BMW는 ‘iX’와 ‘iX3’를 예고했고 아우디는 ‘e-트론 스포트백‘과 ‘e-트론 GT’를 올해 안에 선보일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폭스바겐도 전용 플랫폼을 이용한 전기 SUV ‘ID.4’의 출시를 준비하고 있다.

이호근 대덕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테슬라 입장에선 완성차업계의 전기차 전용 플랫폼이 상당한 위협일 수 있다”며 “그동안 테슬라의 경쟁력은 뛰어난 수준의 반자율주행 기능과 한 번 충전으로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현재는 완성차업체가 이미 따라잡아 흔한 수치가 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고성능차 시장도 포르쉐에 빼앗기고 있고 대중차에선 폭스바겐과 현대기아차에 시장을 내주고 있다”며 “결국 테슬라는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차로 여겨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업계에선 전기차 시장이 더욱 커질 것으로 예측한다. 전기차 출시가 이어지면서 수요도 늘어날 것이란 분석이다. 시장조사업체인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글로벌 전기차 판매량은 지난해보다 40% 이상 성장한 약 688만대 규모로 예상된다. 지난해 전세계 자동차 수요는 15% 줄었음에도 전기차 수요는 30% 늘어 280만대가 판매돼 시장 점유율 3.8%를 기록했다.

한국은 ‘한국판 뉴딜 종합계획’의 10대 대표과제 중 하나이자 그린뉴딜 8대 추진과제로 ‘친환경 미래 모빌리티’ 확대를 꼽으며 전기차로의 전환을 재촉하고 있다. 정부는 2025년까지 전기자동차 113만대(누적)를 보급하고 충전 기반시설(인프라)을 4만5000기까지 확충할 계획이다. 나아가 미래차 비중을 18.9%까지 높인다는 목표다.

본격화되는 전기차 시대를 맞아 국내 자동차산업 생태계의 진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성태윤 교수는 “국내 자동차업계와 부품업계가 달라진 환경을 마주하면서 기존의 경쟁력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필수 교수는 “그동안 국내 부품업계는 글로벌 시장에서 ‘가성비’로 승부해 왔다”며 “하지만 전기차나 미래차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대비가 필요하다. 빠른 업종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분석했다.

박찬규 기자 star@mt.co.kr
./그래픽=김은옥 기자
현대차는 주도권 잡을 수 있을까
테슬라여야 할 이유 없는 전기차 시장
본격적인 전기자동차 시대의 원년으로 꼽힐 2021년 자동차 기업 간 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질 것이란 전망이다. 그동안 미온적이었던 글로벌 완성차 기업까지 테슬라의 성공 신화에 잇따라 전기차 전환을 외치며 출시 계획을 발표하고 있어서다. 일부에 그치지 않고 대다수의 완성차 제작사가 참여하면서 전기차로의 전환 기류가 확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현대자동차가 테슬라의 대항마로 떠오르고 있다. 테슬라가 구축해 온 독주체제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기업이란 평가가 나온다
◆팬덤에 커진 테슬라 왕국

전기차를 논할 때 테슬라는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 ‘얼마나 버틸지’ 의심받던 테슬라는 불과 몇 년 사이 전기차 주도권을 쥐고 시장을 이끌어가고 있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KAMA)에 따르면 지난해 테슬라의 전기차 글로벌 판매량은 45만2330대로 전년에 비해 45.1%나 증가했다. 지난해 전세계 전기차 판매량(203만4886대)과 비교하면 그 비중은 15.1%에 달하며 순수 전기차 시장만 놓고 보면 그 비율은 21.8%까지 늘어난다. 순수 전기차 5대 중 1대가 테슬라 차종인 셈이다.

전문가들은 테슬라의 영향력이 늘어난 배경을 두고 전세계 각국의 환경규제와 이에 따른 친환경차 구매 보조금 정책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한다. 여기에 그동안 테슬라를 제외하면 소비자의 구미를 당길 만한 전기차가 없었다는 점도 한몫했다.

테슬라는 고급형 세단인 ‘모델S’를 필두로 대형SUV ‘모델X’와 보급형 소형 해치백 ‘모델3’에 이어 준중형급 SUV ‘모델Y’로 ‘S3(E)XY’ 라인업을 구축했다. 하이엔드 시장부터 대중시장까지 세단과 SUV를 아우르는 전략으로 소비자를 공략했다. 이런 상황에 1000만원 이상 구매 보조금 혜택까지 더해져 테슬라의 왕좌는 굳건해졌다.

그렇다고 완성차 기업이 테슬라의 질주를 바라보지만은 않았다. 메르세데스-벤츠의 ‘EQC’를 비롯해 BMW ‘i3’와 아우디 ‘e-트론’ 등 일명 독일 3사로 통하는 고급 브랜드도 전기차를 출시했다. 하지만 테슬라와 비교하면 성과를 거뒀다고 보기에는 아쉬운 수준이다. 기존 자동차와 다른 가치를 요구하는 소비자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주행거리 면에서 테슬라가 우위에 있었다. 테슬라 모델3와 모델Y의 1회 완전 충전 시 최대 주행거리(롱레인지·복합 주행 기준)는 각각 496㎞와 511㎞다. 완성차 브랜드가 내놓은 전기차의 최대 주행가능거리가 보통 300~400㎞ 수준임을 감안하면 차이가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에너지 효율이나 배터리 무게보다는 오직 주행거리에 집중했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이다.

이밖에도 국내·외 유명인의 차로 알려지면서 더욱 주목받은 점도 인기 배경 중 하나다. 국내에선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테슬라 1호차를 구입했고 배우 유아인 등 얼리어답터 성격이 강한 유명인사가 테슬라 오너인 점도 소비자의 시선을 긍정적이게 만들었다는 평이다.

권은경 KAMA 환경기술실 수석위원은 “가격과 주행거리 등이 전기차 구매에 중요한 지표가 되지만 ‘팬덤’이 바탕이 된 시장”이라며 “테슬라가 결코 저렴한 차가 아니었음에도 전기차 점유율 1위까지 달성한 것은 합리적인 소비라기보다 만족도에 중점을 둔 것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업계 한 관계자는 “테슬라는 소비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만 철저히 공략해온 결과로 많은 판매량을 기록했다”며 “하지만 사고처리나 수리 등 실제 이용자 입장에서 불만이 끊이지 않았고 이는 호기심에 제품을 구매한 이들의 이탈을 불러왔다”고 꼬집었다.
아이오닉5 /사진제공=현대자동차, 테슬라 전용 충전시설 /사진=로이터

◆테슬라 아니어도 충분해…

앞만 보고 달리던 테슬라의 독주 체제가 무너질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전망이 나온다. 글로벌 완성차 업체가 본격적으로 신차를 예고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동안 약점으로 지적된 주행거리 측면에서도 500㎞에 근접하며 테슬라와 간격이 크게 좁혀졌고 가격도 낮아졌다. 사실상 본 게임은 올해부터라는 평이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연구위원은 “세계적으로도 올해가 전기차 원년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며 “EU(유럽연합)뿐 아니라 미국까지 환경규제에 합세하면서 전기차 공세는 본격적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각사 발표 자료에 따르면 한국에서만 해도 벤츠를 비롯해 BMW·아우디 등에서 올해 약 10종에 이르는 전기차가 출시된다. 눈에 띄는 점은 완성차 기업마다 목표시장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들은 그동안 잘하던 것에 집중하면서 테슬라가 장악한 시장을 공략할 계획이다. 브랜드 특성에 맞춘 제품을 내놓음으로써 정체성을 분명히 한다는 얘기다.

먼저 테슬라가 주력해온 고급 전기차 시장은 벤츠·BMW·재규어 등이 구체적인 신차 계획을 내놓으면서 전쟁을 예고했다. 벤츠는 ‘EQS’와 ‘EQA’ 2종의 전기차를 선보인다. EQ는 벤츠의 전동화 브랜드이며 S는 최상위 모델임을 의미하는 만큼 벤츠의 플래그십 전기차다. EQA는 반대로 벤츠 전기차 중 가장 작다. 엔트리 럭셔리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차종이다. BMW는 SUV ‘iX3’와 ‘iX’의 출시를 예정했다. iX3는 BMW의 중형 SUV ‘X3’의 전기차 모델이다. 아우디 역시 ‘e-트론 스포트백’으로 두 번째 양산형 전기차를 출시한다.

대중 브랜드를 지향하는 GM(제너럴모터스)와 폭스바겐은 각각 ‘볼트EUV’와 ‘ID.4’를 통해 보급형 전기차 시장에 집중할 방침이다. 테슬라의 모델3와 모델Y가 타깃이다.

특수시장에선 포르쉐가 고성능 전기스포츠카 ‘타이칸터보’와 ‘터보S’를 올해 출시할 예정이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출시된 타이칸4S가 올 1월 국내에서만 105대가 판매돼 가능성도 충분히 맛봤다.

이처럼 브랜드 파워를 앞세운 글로벌 완성차 기업이 잇따라 쟁쟁한 전기차를 출시함에 따라 테슬라 팬덤은 크게 흔들릴 것이란 게 일반적 시각이다. 그동안 선발주자인 테슬라가 화려한 품목과 뛰어난 성능을 구현해 소비자의 선택을 받았지만 현재는 물량공세를 퍼붓는 완성차 업체의 공세에 ‘테슬라여야만’ 하는 이유가 사라졌다는 평이다.

그럼에도 테슬라가 당장은 전기차 주도권 싸움에서 밀리지 않을 것이란 시각도 존재한다. 이 연구위원은 “전기차 판매 부문에서 테슬라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며 “테슬라는 이미 브랜드화도 성공한 만큼 당장 완성차 기업이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플랫폼은 엔진과 변속기 등 자동차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를 담는 일종의 그릇이다. 일부 업체는 구성 방식을 뜻하는 ‘아키텍처’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그래픽=김은옥 기자

◆전기차 춘추전국시대… 현대차가 살아남는 방법
업계에선 테슬라 독주체제에 제동을 걸 가장 강력한 후보로 현대차그룹을 거론하고 있다. 직접 맞붙더라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평도 있다. 현대차그룹은 올해 현대 ‘아이오닉5’를 시작으로 기아 ‘CV’와 제네시스 ‘JW’까지 전기차 라인업을 확대한다. 보급모델부터 제네시스의 고급화까지 구색을 갖춘 뒤 테슬라와의 한판 승부를 예고하고 있다.

특히 현대차는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을 유지하면서도 사용자 중심의 편의성을 높이는 전략으로 승부수를 띄웠고 이를 바탕으로 추가 신차를 예고했다. 현대차가 지난 2월 공개해 큰 관심을 모은 아이오닉5의 가격은 5200만원부터지만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보조금을 합할 경우 3000만원 후반까지 떨어진다. 이는 1억원 안팎인 타이칸4S·e-트론 55·EQC·모델S 등 고가의 수입 전기차와는 방향성을 달리 한 것으로 풀이된다.

아이오닉5의 흥행이 한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어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도 나왔다. 김필수 대림대학교 자동차과 교수는 “아이오닉5 출시와 흥행으로 현대차가 전기차 시장에서 사실상 선도그룹에 진입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현대차가 확보한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선 북미에서의 생산이 필연적이란 주장도 있다. 현대차는 전기차 플랫폼 ‘E-GMP’를 활용한 아이오닉6와 7까지 출시를 예고하면서 세단과 SUV로 라인업을 확대할 계획이다. 이는 전세계 시장에 공급할 전기차 물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결국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방침에 발맞추기 위해선 미국 현지 생산이 필요하다는 것.

김 교수는 “현대차는 앞으로 전기차의 미국 내 생산의 이점을 따져봐야 할 것”이라며 “국내에서 전기차를 생산해 글로벌시장에 공급하는 것은 비용 문제 등이 남아있어 미국 내 전기차 생산 라인의 추가 확보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말했다.

지용준 기자 jyjun@mt.co.kr
현대의 전기차, 주문 즉시 만들어준다
다차종 소량 생산 시스템, 싱가포르서 테스트 후 확대 적용 예정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왼쪽)과 찬춘싱 싱가포르 통상산업부 장관이 기념사진을 찍었다/사진=찬춘싱 장관 SNS
자동차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차를 만드는 생산공장의 변신도 눈에 띈다. 자동차가 내뿜는 배출가스는 전혀 없을지라도 차를 움직이기 위한 전기를 만드는 과정과 차를 만들 때 소요되는 에너지도 친환경적이어야 한다는 시각이 생긴 것.
자동차업계가 생산과 운행에서 폐차할 때까지 ‘전주기적 관점’에서 전기차를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생산방식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전기차는 내연기관차보다 부품 수가 30%쯤 적은 데다 최근 장난감 블록처럼 쉽게 끼워 맞추는 전기차 전용 설계 방식인 ‘모듈화 플랫폼’ 도입이 늘면서 한층 유연한 생산이 가능해졌다는 평이다. 자동차회사는 이 같은 생산방식을 통해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로 전환을 서두르고 있다.

이처럼 생산방식에 변화를 주려는 배경엔 소비자 중심의 시장 재편이 예고된 점도 영향을 미쳤다. 카셰어링이나 호출 서비스 등 다른 차를 이용하기가 쉬워졌고 앞으로 자율주행차가 해당 서비스에 도입되면 굳이 차를 소유할 필요가 없어진다. 결국 지금까지의 자동차 생산·판매 방식을 고수하면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이에 발맞춰 차를 주문하고 인도받는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비대면 서비스가 각광받은 데다 간소화된 생산방식으로 소비자의 다양한 요구에 보다 빠르게 대응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치소비가 늘면서 소소한 기쁨을 강조하는 일종의 ‘세리머니’가 중요해진 것도 변화의 배경으로 꼽힌다.

◆소비자 중심 시장에 대응한다

소비자 지향적 브랜드로는 폭스바겐이 대표적이다. 독일 중북부 도시인 하노버에서 동쪽으로 약 70㎞쯤 거리에 위치한 볼프스부르크는 폭스바겐 공장과 자동차 마니아의 성지 ‘아우토슈타트’가 있는 곳이다.
2000년 6월 문을 연 아우토슈타트는 폭스바겐 본사와 자동차 출고장을 하나로 묶어 테마파크로 구성한 장소다. 폭스바겐은 이 시설에 4억3000만유로(약 5700억원)를 투자했고 25만㎡에 달하는 부지에 세계 최대 규모의 자동차 테마파크를 세웠다.

이곳의 명물 ‘카 타워’는 출고를 앞둔 신차 400여대가 주인을 기다리는 곳이다. 높이는 48m에 달하며 건물이 통유리로 돼 있어 밖에서도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 차를 인도받을 고객이 이곳을 방문하면 자판기처럼 차가 배달되며 직접 번호판을 설치할 수도 있다. 이 과정을 지켜보기 위해 이곳을 찾은 누적 방문객은 약 4000만명에 달하고 차를 인도받은 사람도 15만명에 이른다. 이렇게 시설을 체험한 이들의 폭스바겐 브랜드 호감도가 높아져 구매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게 회사의 설명.

현대자동차그룹도 이 같은 개념을 응용한 시설을 짓고 있다. 특히 싱가포르 주롱 혁신단지에 건립되는 ‘현대차그룹 싱가포르 글로벌 혁신센터’(HMGICS)는 자동차 주문부터 생산·시승·인도·서비스까지 소비자의 자동차 생애주기 가치사슬 전반을 연구하고 실증하는 ‘개방형 혁신 기지’(오픈이노베이션 랩)다.

이곳은 2022년 말 완공이 목표며 부지 4만4000㎡, 연면적 9만㎡, 지상 7층 규모로 추진된다. 옥상에는 고속 주행이 가능한 총 길이 620m의 고객 시승용 ‘스카이 트랙’과 도심 항공 모빌리티(UAM) 이착륙장 및 친환경 에너지 생산을 위한 태양광 패널 등이 설치된다.

건물 내부는 다양한 체험 시설은 물론 연구개발(R&D)과 사무를 위한 업무 공간 및 소규모 제조 설비 등으로 구성된다. 내부의 수납형 차 전시공간을 밖에서 들여다볼 수 있도록 건물 외부엔 투명한 유리를 적용한다.

이처럼 상징성이 큰 시설이다 보니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지난 1월 말 싱가포르를 방문해 리셴룽 총리와 찬춘싱 통상산업부 장관 등을 차례로 만나 미래 모빌리티 비전을 공유했다. 지난해 10월 회장 취임 이후 첫 해외출장지로 싱가포르를 택한 것.

당시 정 회장은 리 총리와의 면담에서 HMGICS 사업 추진 계획과 함께 미래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으로의 체질 개선 노력과 비전 등을 설명하며 싱가포르 정부의 협조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찬 장관은 자신의 SNS(사회관계망서비스) 계정에 정 회장과 같이 찍은 사진을 올리며 “정 회장과 전기차·자율주행차·무인항공기 등 다양한 모빌리티 솔루션의 전망과 기회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고 밝히기도 했다.

◆클릭하면 차 만들어주는 곳
현대차그룹에 따르면 고객이 스마트폰 등을 통해 온라인으로 자동차를 주문하면 HMGICS에서는 주문형 생산 기술로 고객이 주문한 내용에 맞춰 즉시 차를 생산한다. 고객은 시설 내 별도로 마련된 공간에서 자신의 자동차가 생산되는 과정을 직접 지켜볼 수 있다. 생산이 완료된 차는 건물 옥상의 스카이 트랙으로 옮겨지고 고객은 트랙에서 시승한 뒤 차를 인도받을 수 있다.

이를 위해 현대차그룹은 이곳에 소규모 전기차 시범 생산체계를 갖춘다. 인공지능(AI)·사물인터넷(IoT)·로보틱스 등 첨단 기술을 접목해 지능형 제조 플랫폼을 실증한다는 구상이다.

궁극적으론 시장 변화 및 수요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다차종 소규모 생산 시스템을 도입해 이를 연구하고 실증할 계획이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이곳에서는 효율성을 높이는 게 목표지만 세밀한 작업과 시스템 통제는 사람이 담당하며 어렵고 위험한 작업은 로봇이 수행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배터리 생애주기 연계 서비스인 ‘BaaS’(Battery as a Service)도 실증한다. 이를 통해 소비자의 전기차 구매 부담을 낮추면서 사용 편의성을 개선할 방안을 찾을 계획이다.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 물류·금융·비즈니스 허브로 새로운 서비스와 기술·트렌드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곳으로 동남아 시장 내에서 신기술 테스트베드로 최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 회장은 “현대차그룹은 HMGICS의 비전인 ‘모빌리티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인간 중심의 밸류체인 혁신’을 바탕으로 고객 삶의 질을 높여 나갈 것”이라며 “HMGICS를 통해 구현될 혁신이 우리의 미래를 변화시키고 인류발전에 기여할 것이라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박찬규 기자 star@m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