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 고전문헌학자© 뉴스1
(서울=뉴스1) 배철현 고전문헌학자 = 지난 일요일 나는 오랜만에 마음이 설렜다.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날 예정이었다. 그 대상을 통해 더 신나고 기분이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란 사실을 직감했다. 그날은 지난 2월, 나에게 정성이 담긴 손편지를 보내온 부천 태풍태권도장 아이들과 이정은 사범님을 만나는 날이었다.
한 시간쯤 달려 부천에 도착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도심 큰 도로를 한참 지나 70~80년대, 흔적이 남아있는 상가들을 지나갔다. 내가 탄 택시는 '소사테마거리'라는 커다란 간판이 붙은 부천 청과물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와보는 풍경인데 익숙했다. 어린 시절 매일 지나다니며 군것질했던 그 거리와 놀랍게도 똑같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야무지지 못한 나를 정신 차리게 만들기 위해 시장 한가운데 상가건물 2층에 있는 태권도장에 보냈다. 그때 사범님은 일주일에 3번, 오후 5시에 도복을 정성스럽게 차려입고 도장 안에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주문했다. 당시엔 왜 그가 그런 무지막지한 주문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태권도는 나에게 연습, 몰입, 인내, 그리고 성취감이란 인생의 중요한 가치를 알려주었다.
택시에서 내린 후, 나를 반긴 것은 고향을 그립게 만드는 향기였다. 참기름 집에서 구수한 들기름 냄새가 흘러나오고 떡 방앗간에서는 방금 찐 시루떡이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 태권도장이 있었다. 5층 벽돌 건물인데,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는 완전체 건물이었다. 1층에는 오리고기 전문점, 중국식품점, 그리고 쌀 직판장이 있다. 신체의 건강을 책임져 주는 가게들이다. 2층에는 태풍태권도장이 있다. 간판에 아동인성교육기관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이 도장의 사범님은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통해 인성을 가르치려는 분이다.
도장 안으로 들어가니 수련생들이 자신들이 갈고닦은 품세를 보여주기 위해서 차렷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고 환히 웃었다. 누가 나를 이렇게 간절히 만나길 기다리고 있다니! 나는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도장 중앙에는 조그만 의자가 놓여있다. 나는 그 위에 앉아 아이들의 시범을 보았다. 사범의 구령 소리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품세를 보여주었다. 수 년 동안 갈고닦은 기품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먼저 빨간 바지를 입은 여학생 시범단이, 그 후에 파란색 바지를 입은 남학생 시범단이 우아하고 절도가 있는 품세를 보여주었다. 모두 태권도 유단자로 3~4품 하는 아이들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태권도 수련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환경을 극복하고 온전하고 완벽한 자신을 만들려는 이들의 수고가 내 마음에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아, 이 아이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지속적으로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들은 시범을 마친 후에 내 앞에 앉았다. 내가 이들에게 무언가를 말할 차례다. 일생 강연해온 내가 그날은 말을 더듬었다. 수년 동안 강도가 높은 육체와 정신 수련을 한 아이들에게 내 강연은 말장난 수준이다. 나를 만나기 위해 오랫동안 기다린 이 수련생들에게 나는 실망이었을 것이다. 내가 강연을 망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들의 기품에 눌려 내가 초라했기 때문이다. 이 아이들의 수련에 비해 내가 덜 수련되었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받아야 할 사람은 이 수련생들이 아니라,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세, 눈길, 몸짓, 경청하는 모습, 미소가 자연스럽고 친절했다. 이들이 오랫동안 자기 극복을 위해 간절하게 매진해 왔다는 증거다.
나는 어쭙잖은 강연을 마친 후에 이들과 마주 앉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지난 3년 동안 매일 적은 자기 점검 읽기, '심연'과 '수련'을 필사한 노트, 그리고 일과표를 보여주었다. 모든 수련생들이 족히 20권이 되는 분량을 자신 앞에 진열해 놓았다. 맨 앞에 앉은 여학생은 김리연이다. 리연이는 수년 전 중국에서 온 학생이다. 내가 리연이를 기억하는 이유는, 지난 1월에 기억에 남을 만한 편지를 내게 보냈기 때문이다. 리연이는 내 책을 읽고 다음과 같은 손편지를 보냈다.
"교수님의 책에서 '준비하지 않는 자는 이미 실패한 자다'라는 문장이 인상 깊었고 '창조적인 삶은 필요가 없는 것들을 매일매일 걷어내는 행위다'라는 문장도 인상이 깊었습니다. 2019년 12월까지만 해도 다른 애들이랑 똑같이 매일 핸드폰만 보고 하루를 흘려보낸 삶을 살았는데, 2020년 1월부터 책을 만나게 되면서 인간다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이미 실패를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저의 삶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제 삶에 있는 군더더기를 하나하나씩 제거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제가 또 다른 세계로 넘어갔고 매일 매일이라는 손님을 더 소중하게 여기며 삶을 단순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리연이는 '준비'를 마음에 새기고 창조적인 삶을 매일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매일 매일은 흘러가는 세월이 아니라 귀한 손님이다. 내가 이제는 리연이의 글을 필사할 차례다. 리연이가 나에게 3년간 쓴 일기를 보여주었다. 글씨가 예쁘고 글이 논리정연하다. 이런 것을 어디에서 배웠을까? 아마도 리연이에게 태권도뿐만 아니라 삶의 기술을 가르쳐주신 사범님의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리연이는 홈스쿨링을 하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수학이다. 학교에 가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말한다. 배짱도 두둑하다. 리연이는 도장에서 매일 서너 시간씩 인터넷 강의를 듣고 독서와 태권도 수련을 겸하고 있다. 리연의 눈은 해맑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자신의 손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담겨 단호했다.
관장님께서 아이들에게 영어원서를 필사시키고 싶다고 말한다. 나는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Jonathan Livingston Seagull)을 추천하였다. 나는 이 아이들이 조너선 리빙스턴처럼, 인생이란 '완벽한 비행'을 위해 매일 매일 수련하여 자신이 사랑하는 자유를 찾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 다음 방문에는 리연이와 친구들과 함께 리빙스턴 이야기를 실수하지 않고 나누고 싶다. 나는 리연이처럼, 매일 매일을 귀한 손님으로 대하는가?
리연이의 손편지©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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