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 시대 육체 노동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모방 경제는 고생하는 노동의 표본이었다. /그래픽=김은옥 기자(챗GPT)
산업혁명을 지나 AI(인공지능) 시대를 맞은 현재에는 노동의 개념이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많이 일하고 적은 임금을 받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절도 있었으나 현재의 경제 환경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고생하는 노동'이 아니라 '가치를 창출하는 일'이 중요해 졌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시기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들은 무산계급인 노동자의 육체적 노력을 착취하며 부를 축적해 오늘날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뼈대를 만들었다. 노동 가치에 턱 없이 모자란 임금은 자본가에게 막대한 잉여가치를 안겨줬지만, 대다수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 속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기업가들과 좁힐 수 없는 간극에 직면해야 했다.

불평등 심화와 이에 따른 사회 갈등은 눈부신 경제 발전의 어두운 이면이다.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던 노동자들은 결사체를 구성해 조금씩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투쟁의 역사로 시작된 노동조합은 정당한 대우를 외치며 합리적인 대우가 보장되는 근로 환경을 구현해갔다.


한국 또한 산업화 과정에서 비슷한 길을 걸었다. 1960~1980년대 고도 성장기 핵심 전략은 '저렴하게 많이 생산하는 것'이었다.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제조업을 성장시켰고 이를 통해 수출 경쟁력을 갖췄다. 초기 경공업에서 시작해 중화학공업까지 이어지면서 산업 체계가 고부가가치 기술 중심으로 재편됐지만 여전히 고생이 수반되는 노동 없이는 나아가지 못하는 구조다.

그 시기 유사한 제품의 가격 경쟁이 이어졌다. 남들이 선보인 서비스와 상품은 경쟁 기업에 의해 곧바로 시장에 등장했고 품질을 판단하기 어려웠던 소비자들은 곧이곧대로 소비하는 모방경제의 매커니즘을 따랐다. 정부의 인허가권이나 자체 생산 인프라만 있다면 상대적으로 치열한 고민 없이 성장하고 사업을 영위하는 데 어려움은 크지 않았다.

1990년대 이후 정보통신기술(ICT) 발전과 함께 노동 패러다임도 변화했다. 단순 반복 노동의 가치가 감소하고 창의성과 혁신이 강조되는 경제 구조로 전환된 것이다. 인터넷과 데이터 공유가 보편화되면서 과거처럼 일부 기업이 영속적으로 기술을 독점하기 어려워졌다. 정보 유통이 빨라지면서 누구나 실시간으로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를 접할 수 있게 됐고 따라하는 것만으로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힘들게 됐다. 기술과 아이디어를 빠르게 습득하고 응용하고 차별화하는 능력이 성패를 결정짓는 요소가 됐다.


모방경제를 벗어난 혁신경제 시대는 창의적인 기술력이 기업의 생존을 담보할 수 있는 구조다. 노동력만 확보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참신한 도전이 요구된다.

한국 경제는 여전히 반도체, 철강, 자동차 등 전통 제조업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전에는 이러한 산업이 국가 경쟁력을 주도했지만 글로벌 경제 환경 변화에 따라 새로운 성장 동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모방경제의 종말… 혁신을 위한 조건은
모방경제가 끝난 혁신경제 시대엔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그래픽=김은옥 기자(챗GPT)
한국은행이 발표한 '2024년 국민소득'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3만6624달러로 집계됐다. 2014년 3만달러를 돌파한 이후 10년 넘게 4만달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반면 일본, 프랑스, 영국 등은 3만달러에서 4만달러로 성장하는 데 몇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한국 경제가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하고 기존 산업 구조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지적이 뒤따른다. 정부 규제와 경직된 노동 시장이 혁신 기업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는 시각이 많다.

자동화와 AI 기술의 발전으로 단순 반복 노동이 줄어들고 있는 가운데 노동자들이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교육과 재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국의 직업 교육 시스템은 과거 제조업 중심 훈련 방식에 머물러 있어 변화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교육과정 역시 수차례 개정을 거듭했지만 근본적인 틀은 유지하되 과거의 방식에 내용을 덧붙이고 있는 형태다. '진리의 상아탑'으로 불리는 대학교에서도 배움보단 취업을 위한 압박이 거센 실정이다. 대학 경쟁력 대신 취업률에 신경을 쓰는 현실이 그 방증이다.

노동력의 한계를 딛고 '가치를 창출하는 일'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형국이다. 미국과 유럽의 혁신 기업들은 이미 창의적인 업무 환경을 조성하고 있으며 단순 노동보다는 기술과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하는 직무를 확대하고 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200년 되는 노동의 역사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며 "노동의 대전환기"라고 말했다. 이어 "AI 범람 속에서 일자리가 지속될 수 있는지가 문제"라며 "기술의 발전으로 생산력이 크게 증가한 만큼 수요가 많이 줄고 있어 노동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고민인 상황"이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