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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때 묻은 손으로 쌓은 꿈… 이재명의 '억강부약'은 여기서 시작됐다━
1963년 10월23일, 경북 안동 예안 도촌리의 깊은 산골.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난 이재명의 어린 시절은 지나칠 정도로 가족에게 냉담했던 아버지와 삶의 무게에 짓눌려 아들의 출생일조차 헷갈려했던 어머니 밑에서 빈곤하게 자랐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아버지는 어느 날 홀연히 고향을 떠났고 어머니는 깊은 산 속 밭을 일구며 아이들을 먹여 살렸다. 어린 이재명과 동생들도 지게에 땔감을 지고 40리 길을 걸어 밀가루 구호식품을 받아오는 등 고된 노동에 동참했다.1976년 2월,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열세살 이재명은 중앙선 상행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아버지와 둘째형이 있는 성남으로 향했다. 청량리역에 내려 239번 버스를 타고 눈발 날리는 진창길을 지나 상대원동 언덕배기에 자리한 반지하 단칸방에 도착했다. 그는 새 터전의 첫인상이 고향 산골보다 더 열악했다고 회상한다.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한 그에게 살 길은 공부뿐이었다. 1978년 4월 고입검정고시 야간반에 등록했다. 아버지는 공부 때문에 생계 전선에서 이탈하려는 이재명에게 "착실히 일이나 할 것이지 뭔놈의 공부냐"고 호통쳤지만 끝내 고입 검정고시 학원 야간반을 다니겠다는 아들의 고집을 꺾진 못했다.
1979년 여름, 오리엔트주식회사에 취직해 시계 표시판 도장·도금 작업을 맡았다. 밀폐된 작업실은 독한 화공약품 냄새로 숨쉬기조차 힘들었지만 남들 눈을 피해 책을 펼칠 수 있는 은신처이기도 했다. 할당량을 서둘러 마친 뒤 그는 작은 공간에서 대입 검정고시 교재를 읽었고 퇴근길엔 교과서 속 시(詩)를 외우며 고단한 심신을 달랬다.
공장 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공부에 매진한 끝에 이재명은 같은 해 8월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4월 대입 검정고시까지 통과했다. 소년공으로 보낸 6년, 기름때 묻은 손으로 쌓아 올린 이 시간들은 훗날 그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억강부약'(특권과 반칙에 기반한 강자의 욕망을 절제시키고 약자의 삶을 보듬는) 정치 철학의 토양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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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아픔에서 길을 찾다…'약자를 위한 변호사' 결심━
민주화의 잔향이 한국 사회를 휘감던 1988년 어느 주말, 성남YMCA 회관 앞에서 당시 빈민운동가였던 이상락(훗날 열린우리당 의원)과 사법연수생 이재명이 만나게 됐다. 그날 이후 이재명은 YMCA 시민중계실에서 무료 법률 상담 봉사를 시작했다. 이재명은 일당을 받지 못한 일용직 노동자와 부당한 대우를 견뎌야 했던 여공,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부녀자들과 마주 앉았다. 노동자들의 사연을 듣는 순간이면 자신의 소년공 시절이 떠올라 결코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았다.
학생 티를 벗지 못한 예비 법조인이었지만 그는 상담하러 온 이들에게 고단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의 가능성을 찾게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약자를 위한 변호사'라는 진로를 굳혀 나갔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이재명이 노동법학회에 가입해 활동하던 중 당시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떨치던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강연을 듣게 되면서다. 그때부터 그의 꿈은 판·검사로서의 부와 안락이 아니라 억눌린 이들과 함께 싸우는 인권변호사로 확고히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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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 변호사'로 현장을 지킨 청년, 정치 중심에 서다━
이 시기 그는 피아노 전공자였던 김혜경 여사를 셋째 형수의 소개로 만나 약 1년의 열애 끝에 결혼해 두 아들을 두게 됐다.
2004년, 성남 구시가지 대형 병원 폐쇄로 의료 공백이 심각해지자 그는 직접 시장이 돼 시립의료원을 만들겠다 결심했다. "사람들의 삶에 대한 고려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그들을 내몰아야 한다는 의무감과 사람들의 고통스런 삶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된다는 사명감이 밀려 와" 시장출마를 결심했다. 그렇게 '정치인 이재명'이 탄생했다.
이 후보는 2006년 지방선거에 도전했지만 낙선했고 2008년 총선 경선에서도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2010년 민주당 소속으로 성남시장에 재도전해 마침내 당선됐다. 취임 11일 만에 성남시 모라토리엄(채무불이행)을 선언하는 파격적 행보로 주목받았고 공무원 인사비리 척결과 재정 정상화로 2014년 재선에 성공했다. 성남시장 시절 무상 교복, 공공산후조리 지원, 청년 배당 등 보편적 복지 정책을 통해 '이재명표 브랜드'를 확립했다.
'변방의 장수'였던 그는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가장 먼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외치며 야권 지지층의 주목을 받았다. 돌직구 발언과 사이다 행보로 견고한 팬덤을 구축하며 대선주자 반열에 올랐다.
2017년 대선 경선에서는 문재인 후보에게 패했지만 2018년 경기도지사에 당선되며 재도약했다. 도지사 시절 청년통장과 닥터헬기 구매, 공공배달앱 개발, 지역화폐, 수술실 CCTV 설치 등 생활 밀착형 정책을 추진했다. 동시에 기본소득·기본금융·기본주택 등 '기본 시리즈' 정책을 구체화하며 차세대 대권 주자로 부상했다.
2022년 제20대 대선에 재도전한 그는 0.73%p(포인트) 차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에게 패했지만 곧 인천 계양을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고 같은 해 8월 민주당 대표에 선출됐다. 지난해 4월 실시된 제22대 총선에서는 민주당 압승을 이끌며 정치권의 중심에 섰다. 같은 해 열린 전당대회에서는 85%라는 역대급 득표율로 재신임을 얻어 '이재명 일극 체제'를 완성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1위를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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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사명'에서 '잘사니즘'까지…이재명의 꿈━
정치에 뛰어든 이유 역시 다르지 않았다. "생존을 위해 습기차고 어두운 공장에서 하루를 꼬박 어린 몸을 구겨놓고 일을 했으며, 턱없이 모자라는, 제때에 주어지지 않는 월급을 받기 위해 길거리로 뛰쳐나온 노동자들과 어깨를 함께 했다. 분명 국민이 주인인 시대는 되었건만 여전히 그들 위에 군림하고 제 뱃속 채우기에 급급한 행정관료들과 싸우느라 길 위에 설 수밖에 없었다." (이재명 블로그 中)
참혹했던 어린 시절을 딛고 '불평등·불합리·불공정'을 개선하겠다는 목표를 품은 그는 2025년 4월 27일, 다시 한 번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여전히 같은 이유로 길 위에 섰다. "대립과 갈등이 큰 이유는 경제력 때문이다. 더 잘살게 됐는데도 부족한 것은 부가 편중됐기 때문이다. 총량은 늘었지만 너무 많이 한 군데에 몰려 있다. 그게 갈등의 원인이다." (2025년 4월10일 이재명 발언)
지난 대선 당시 이재명은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이른바 '먹사니즘'을 다짐했다. 그의 다짐은 2025년 '잘사니즘'으로 돌아욌다. 민생 문제 해결을 통해 당장 국민의 삶을 개선하고 성장의 과실을 고루 나눠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돕는 '최고의 도구'가 되겠다 밝혔다. 'K-이니셔티브'로 대한민국을 인공지능(AI) 3대 강국으로 만들겠다는 청사진도 내놓았다. AI 투자 100조원 시대를 열어 성장을 견인하고, 그 과실을 공평하게 나누겠다는 그의 구상이 오는 6월3일 이후 현실로 이어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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