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TC본더 장비 발주처를 한화세미텍까지 넓히면서 기존의 단독 공급사였던 한미반도체와의 관계가 흔들리고 있다. /사진=한미반도체
TC본더를 둘러싼 SK하이닉스와 한미반도체의 갈등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SK하이닉스가 한미반도체로부터 독점 공급받던 장비를 한화세미텍에 추가 발주하면서 양사 관계에 균열이 일었다. SK하이닉스는 공급망 다변화 차원에서 내린 선택이라는 입장이지만 한미반도체가 TC본더 '독점 공급' 지위를 잃은 만큼 완전한 관계회복은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SK하이닉스는 최근 TC본더를 한미반도체와 한화세미텍에 동시 발주했다. 금액은 각각 428억원, 385억원으로 차이나지만 한화세미텍의 경우 공시 금액에서 부가가치세(VAT)가 제외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두 회사의 납품 규모는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두 회사의 합산 공급량은 30대 수준으로 알려졌다.


TC본더는 반도체 칩과 기판을 연결하는 첨단 패키징 장비로 고대역폭 메모리(HBM) 등 차세대 메모리 구현에 필수다. 그동안 이 장비는 사실상 한미반도체가 SK하이닉스에 독점 공급해왔다.

SK하이닉스는 한미반도체와 HBM 개발 초기부터 협업하며 해당 장비의 성능 개선과 공정 최적화 작업을 함께 수행했다. 한미반도체 역시 SK하이닉스의 수요를 기반으로 기술을 빠르게 고도화하며 글로벌 반도체 장비 시장에서 입지를 굳혀왔다.

양사의 관계가 급변한 것은 지난해 말부터다. SK하이닉스는 한화세미텍에 TC본더 시제품 테스트 및 일부 초기 발주를 진행했다. 공급망 싱글벤더 구조를 탈피하고 듀얼벤더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다. 지난 3월엔 SK하이닉스가 2주 차이를 두고 연달아서 한화세미텍과 약 210억원 규모의 TC본더 계약을 체결했다.


독점 지위를 위협받은 한미반도체는 반격에 나섰다. SK하이닉스에 장비 비용을 25% 올리겠다고 통보한 데 이어 SK하이닉스 팹에 파견한 CS 엔지니어를 모두 철수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반도체가 지난해 9월 SK하이닉스 전담 A/S 팀을 꾸린지 7개월 만이다.

SK하이닉스 전담 A/S 팀을 창설 당시 곽동신 한미반도체 부회장은 "SK하이닉스는 글로벌 인공지능 반도체 시장을 선도하는 핵심 기업이고 한미반도체의 가장 중요한 고객"이라며 애정을 드러냈다.

SK하이닉스가 한미반도체에 TC본더 발주를 재개했지만 완전한 관계회복은 미지수다. 한미반도체가 '기술력은 우리가 앞선다'는 자부심이 컸던 만큼 독점 지위 상실이 주는 여파가 상당할 것이란 분석이다. 한미반도체는 향후 물량 배분, 가격 협상 등에서도 예전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SK하이닉스도 주요 장비에 대해 복수 공급 체제를 확대해나갈 가능성이 크다. 단일 공급사 체제는 가격 협상력 저하와 기술 발전 속도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삼성전자 등 주요 반도체 업체는 주요 장비에 대해 2~3개 공급사를 동시에 운용하는 다중 공급 전략을 이미 채택하고 있다.

한동안은 현재 체제가 유지될 전망이다. SK하이닉스는 HBM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생산을 멈출 수 없고, 생산 설비 운용 과정에서 한미반도체의 협조가 필요하다. 한미반도체 역시 캐시카우인 SK하이닉스를 놓친다면 타격이 불가피하다.

한미반도체는 미국 마이크론 등 글로벌 기업을 대상으로 영업을 확대하며 SK하이닉스 의존도를 낮추고 있다. 올해 1분기 한미반도체의 매출(1474억원) 중 해외 고객사 비중은 90%로 집계됐다. 지난해 말 해외 매출 비중이 41.3%였던 것을 감안하면 약 2배 증가했다. 정확한 수치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SK하이닉스의 비중이 크게 감소한 것으로 추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