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조사 후 '공주 왕릉원 1~4호분' 전경(국가유산청 제공)


(서울=뉴스1) 정수영 기자 = 백제가 웅진기(475~538) 초기부터 굳건한 정치체계와 활발한 대외 교역을 유지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유물들이 확인됐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한성(현 서울)에서 웅진(현 공주)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17일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이하 연구소)에 따르면,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재조사 결과 백제가 웅진 시대 전반부터 이미 안정적인 내부 정치체계와 대외 교역망을 운영했음을 시사하는 유물들과 왕실의 돌방무덤 구조가 확인됐다.

연구소가 이번에 조사한 왕릉원 1~4호분은 무령왕릉 묘역 북동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동쪽부터 1호 2호 3호 4호분이 나란히 배치돼 있다. 연구소는 2023년 9월부터 해당 유적에 대한 재조사를 진행 중이다. 이는 96년 만에 다시 이뤄진 조사다.

오동선 연구사는 뉴스1에 "1927년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의해 한 차례 조사가 이뤄졌지만, 조사 방식이 거칠어 충분한 정보가 남지 않았다"며 "이 때문에 해당 왕릉에 대한 재조사를 진행하게 됐다"고 말했다.


공주 왕릉원 2호분 출토 장식귀걸이(국가유산청 제공)


연구소에 따르면 이번 재조사의 성과는 크게 네 가지다.

먼저 한성기에서 웅진기로 이어지는 백제 왕실 무덤의 양식이 공통으로 드러났다. 1~4호분 모두 경사면을 깎아내 완만하게 조정한 다음 가장 동쪽부터 순서대로 조성됐다. 또 지하에 만들어진 무덤 속 굴식 돌방무덤은 천장을 돌 한 장으로 덮는 궁륭식 구조였으며, 내부 벽면에는 석회를 바르고 바닥에는 30㎝ 두께의 강 자갈을 채운 공통된 양식을 갖추고 있었다.

웅진 초기에도 백제의 대내외 정치 체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었음도 확인됐다. 특히 2호분에서는 청색 유리옥이 달린 금귀걸이를 비롯해 화려한 유물들이 대거 출토됐다. 함께 발견된 은에 금을 도금해 줄무늬를 새긴 반지는 신라 경주 황남대총 북분에서도 유사한 형태가 출토된 바 있어, 당시 백제와 신라 간 긴밀한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웅진 천도 초기에도 백제의 대외 교역망이 활발히 유지되고 있었다는 결과도 얻었다. 1~3호분에서 유리옥 1000여 점이 출토됐는데, 이 가운데 황색·녹색 유리옥의 납 성분이 무령왕릉과 동일하게 태국산으로 분석됐다. 이는 백제가 웅진기 초부터 동남아시아와의 광범위한 교역망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연구소는 설명했다.

공주 왕릉원 2호분 출토 어금니 (국가유산청 제공)


2호분의 주인공이 제23대 삼근왕(재위 477~479)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발견한 것도 성과로 꼽힌다. 2호분에서 출토된 금귀걸이와 함께 나온 어금니 2점에 대한 법의학 분석 결과, 어금니의 주인은 10대 중후반의 연령대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라 2호분의 조성 시기인 웅진기 초기 왕인 개로왕(21대)의 직계 후손 가운데 유일한 10대 군주였던 삼근왕일 가능성이 커졌다.

한편, 연구소는 오는 18일과 19일 오전 11시 발굴 현장(충남 공주시 금성동 산5-17)에서 일반 국민에 직접 공개 설명회를 진행한다.

공주 왕릉원 2호분 출토 귀걸이와 주요유물 분포도(국가유산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