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피사로 (출처: Miscellaneous Items in High Demand, PPOC, Library of Congress, 1891,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541년 6월 26일, 잔혹한 잉카 정복자로 악명 높았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리마에 위치한 자신의 저택에서 무참히 살해당했다. 그의 나이 60세였다.


피사로는 압도적인 소수 병력으로 잉카 제국을 무너뜨리고 남미에 스페인 식민지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그는 탐욕과 잔인함으로 점철된 정복자였지만, 그의 마지막은 잉카인들의 복수가 아닌, 그 자신의 동료들의 배신과 피로 얼룩진 비참한 최후였다.

그를 살해한 이들은 다름 아닌 디에고 데 알마그로 엘 모소를 따르는 일련의 스페인 병사들이었다. 이들은 피사로의 옛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디에고 데 알마그로의 아들인 엘 모소의 추종자들이었다.

피사로와 알마그로는 잉카 정복 초기부터 동맹 관계였지만, 정복 이후 얻은 영토와 부의 분배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특히 잉카의 수도 쿠스코의 소유권을 둘러싼 갈등은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 번졌다. 1538년, 알마그로는 라스 살리나스 전투에서 피사로 형제들에게 패배해 처형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알마그로의 죽음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깊은 원한을 심어줬고, 그들은 피사로에게 복수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사건 당일, 약 20명의 알마그로 추종자들이 피사로의 저택을 급습했다. 피사로는 침입자들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수적인 열세와 갑작스러운 공격에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마지막 순간 십자가를 그리며 신을 찾았다고 전해진다.

피사로의 죽음은 잉카 정복의 피비린내 나는 종말을 고하는 동시에, 스페인 정복자들 사이의 권력 투쟁과 탐욕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의 최후는 정복의 대가를 치른 비극적인 결말이자, 인간의 탐욕과 권력욕이 빚어낸 참극의 한 페이지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