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장아름 기자
* 영화의 주요 내용을 포함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한 시대에는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다. 빛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건 그림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서로를 규정하는 상호 관계를 의미한다. 그 시대의 '양면성'을 담는 깊이가 있어야 비로소 '공감'에 이를 수 있는 이유다. '고백의 역사'는 1998년을 영화로 끌어왔지만 당시 시대적 맥락을 간과한 순진무구한 청춘 로맨스를 보여주면서 피상적 추억 소비에 그친 작품이 됐다.
오는 29일 처음 공개되는 넷플릭스 새 영화 '고백의 역사'는 1998년, 열아홉 소녀 박세리(신은수 분)가 일생일대의 고백을 앞두고 평생의 콤플렉스인 악성 곱슬머리를 펴기 위한 작전을 계획하던 중 전학생 한윤석(공명 분)과 얽히며 벌어지는 청춘 로맨스 영화다. '힘을 낼 시간'으로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대상을 수상하고,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받으며 감각적인 연출을 인정받은 남궁선 감독의 신작이다.
영화는 악성 곱슬머리가 콤플렉스인 고3 세리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세리는 학교 최고 인기남 김현(차우민 분)을 짝사랑 중이다. 세리에겐 김현에게 찰랑이는 긴 생머리로 고백하고자 하는 중대한 목표가 있지만, 20만원이나 하는 비싼 매직 스트레이트 파마의 가격은 도저히 감당할 엄두가 안 난다.
세리의 반에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사 온 윤석이 전학해 온다. 윤석은 바다에 빠졌을 당시 세리가 구해줬던 인연이 있다. 세리는 윤석이 미용실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세리는 다리를 다친 윤석의 등하교를 도우며 윤석의 어머니로부터 매직 스트레이트를 받을 꿈에 부푼다. 일생일대의 고백 작전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영화는 1998년 부산을 배경으로 한다. 시대 배경 구현엔 상당한 공을 들였을 정도로 추억을 상기하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아이템들이 곳곳에 반갑게 등장한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컬러풀한 음료수 '네버스탑'부터 집마다 꼭 하나씩 있던 체크무늬 우산, 추억의 전자 기기 엠씨스퀘어 그리고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로 시작해 눈물바다가 되는 수련회 문화까지 1998년도를 시각적으로 디테일하게 구현한 프로덕션이 돋보인다.
1998년도를 담아내는 시각적 구현에는 충실했지만, 인물을 시대상에 녹이진 못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풋풋하고 순진한 청춘 로맨스로 흐름을 일관되게 이어간다. 고3의 최대 고민이 될 수 있는 시험과 진로, 대학 진학보다 짝사랑, 그리고 외모가 인생 최대 고민이다. 세리가 김현과 야자실을 함께 쓰기 위해 학업에 몰두하고자 하는 장면도 나오지만, 이 역시 짝사랑을 이루고자 하는 과정일 뿐이다. 영화가 미처 세심하게 담지 못했던 세리 주변의 대다수 친구도 마찬가지.
특정 시대상을 그릴 때 인물은 시대와 조응해야 한다. 1998년도는 1997년 말 터진 외환위기가 본격적으로 서민의 삶을 흔들었던, 대한민국 사회에서 경제적 불안을 상징하는 시기다. 당시 10대들 역시 중·장년층 못지않게 불안정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생생하게 경험했던 세대였다. 부모 세대의 대거 실직, 구조조정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고용의 불안정과 경제 위기 트라우마, 무한 스펙 경쟁이 체화된 세대이기도 하다. 그런 이들이 현재 한국 사회를 끌어가고 있는 주요 세대인 만큼, IMF의 그늘은 지속되고 있다.
남궁선 감독은 '고백의 역사'를 통해 전하고 싶은 것으로, 10대에 할 수 있는 아기자기한 고민을 꼽았다. 그는 "곱슬머리가 이 영화 각본의 메인 이벤트"라며 "이 소녀에게는 다른 무엇도 아니고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는 곱슬머리가 너무나 큰 콤플렉스"라고 말했다. 이어 "'이걸 꼭 바꿔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화두라고 생각했다"며 "10대들이 외모에 신경 많이 쓰고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한탄하며 살지 않나, 그런 감정들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세팅이라고 생각해서 곱슬머리로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영화는 세리가 자신 본연의 모습 그대로를 봐주는 이에 대한 진심과 소중함을 깨닫는 것으로 성장을 그려낸다. 다만 러닝 타임 118분이 온통 연애와 고백, 외모에 대한 납작한 고민으로 채워지면서 1998년도를 굳이 왜 소환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매직 스트레이트 파마가 1990년대 후반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점 외엔, 세리의 귀여운 깨달음을 위해 1998년도가 반드시 소환돼야 할 이유에 공감하기 어려울 만큼, 명분을 찾기 어려웠다.
남궁선 감독은 1998년이 담겨야 했던 이유에 대해 "불안하지 않았던 시절은 아닌데 문화적으로 이상한 낙관주의가 있었던 시절"이라며 "1세대 아이돌 가수들이 나오고 대중문화에서 폭발적으로 새로운 것들이 나오면서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것이 열렸던 시기"라고 했다. 하지만 H.O.T.와 S.E.S. 그리고 핑클이라는 인기 아이돌로 공유하고 있는 향수로 영화를 장식만 할 뿐, 그 시대적 맥락과 청소년 세대 정체성까지 담는 깊이를 보여주진 못했다.
후반부 역시 개연성은 헐거워진다. 세리와 윤석의 재회는 갑작스럽게 여겨질 만큼, 영화의 공백은 도드라진다. 고무적인 것은 배우들의 호연은 돋보인다는 점이다. 신은수는 10대 시절 이성에 대한 풋풋한 감성을 표현하며 공명과도 사랑스러운 케미를 살려냈다. 부산 사투리는 '로컬 바이브'가 다소 부족하지만, 대본을 통으로 외우는 열정을 보여줬다. 또한 최근 라이징 스타로 떠오른 차우민 역시 매력적인 비주얼로 존재감을 더욱 각인시켰다.
특정 시대를 강조하지 않았다면 청춘 로맨스 장르로는 풋풋한 연애 감성을 잘 살려내는 데 충실한 작품으로 남을 수 있었다. 남궁선 감독은 "이 작품은 소소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 소소함에 목숨을 거는 게 우리의 10대였다"며 "마음의 빗장을 풀고 보시면 재밌게 보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감독의 당부대로 그 1998년을 살아가는 고3 학생들의 소소함이 안방 시청자들까지 사로잡을 수 있을지 더욱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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