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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도전, 위기를 기회로 만들다━
최 명예회장은 1973년 10월 미국에서 MBA와 3년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영풍광업에서 재무·회계업무를 맡았다. 8개월이 흘렀을 무렵에는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같은 해 정부에서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을 발표했고, 당시 아연·연 광산 사업을 하던 고려아연이 제련업종 담당 기업으로 선정됐다. 대한민국이 중화학공업 육성의 신호탄을 쏜 시기가 이때였다. 그렇게 비철금속제련사업이 시작됐고, 최 명예회장은 정부·금융회사 등 여러 관계자들과의 계속된 협의 끝에 1974년 8월1일 단독회사를 설립했다. 기술·자금·경험 없이 시작하기엔 매우 큰 규모의 사업이지만, 최 명예회장은 '도전'이라는 단어의 힘을 믿고 열정적으로 사업일 일궈나갔다.
그러나 사업 자금을 확보하는 건 어려운 문제였다. 최 명예회장은 자금 마련을 위해 국내에선 국민투자기금과 산업은행 등에서 빌렸고, 수소문 끝에 IFC를 알게 됐다. IFC에서 사업자금으로 7000만불(약 700억)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지만, 그는 5000만불에 해낼 수 있다 설득했다. 5000만불을 부채 60%, 자기자본 40% 비율로 맞춰 오라는 부분도 7:3으로 협상했다. 결국 IFC에서 1300만불을 빌려주고, 400만불을 자본금으로 투자했는데, 이는 당시 IFC가 투자한 민간기업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최 명예회장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턴키계약 대신 직접구매에서 건설까지 하는 방법을 택했다. 모든 것을 내 손으로 해보겠다는 그의 선택은 비용 절감뿐만 아니라 노하우와 기술을 모두 익히게 되는 '신의 한수'가 됐다. 특히 7000만불을 생각했던 IFC의 예상을 뒤엎고 4500만불로 공사를 완성, 최 명예회장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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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성장 DNA, 고려아연 성장의 초석이 되다━
최 명예회장은 아버지인 최기호 선대회장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당시 집안이 넉넉하지 못했던 선대회장은 일찍부터 사업에 뛰어들었다. 사업을 하다 보니 주위에 부잣집 아들이 많았지만, 이들이 6.25전쟁으로 38선을 넘어오면서 재산을 다 잃었다는 이야기를 최 명예회장에게 전했다고 한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재산을 잃고 나면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손에 쥔 재산은 언제든 잃을 수 있지만 머리에 든 재산은 절대 잃지 않는다는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최 명예회장 역시 살아생전 성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14년 고려아연 창립 40주년에서도 "나는 혁신이나 개혁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늦은 것이다. 매일매일 조금씩 발전해 나가면 한꺼번에 큰일을 해야 할 필요가 없다. 개혁보다는 변화가 중요하다"고 직원들에게 메시지를 전한 바 있다.
자원 불모지인 대한민국에서 고려아연을 세계 비철금속 1위 기업으로 만든 그의 정신은 고려아연과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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