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13일 전태일 열사가 분신했다. 사진은 전태일 열사의 생전 모습. /사진=전태일기념관
1970년 11월13일 스물두 살 청년 전태일은 서울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과 함께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한 청년의 절규는 단순한 항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법과 정의를 외면한 사회를 향한 마지막 경고였다.
분신으로 외친 노동 정의의 시작
전태일은 1965년부터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며 현장 노동자들의 장시간·저임금·열악한 작업환경을 직시했다. 하루 14시간 넘게 일하는 동료들은 대부분 10대 여공이었고 임금은 형편없었다. 그는 근로기준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아무도 지키지 않는 현실에 분노했다.
전태일은 1969년 동료들과 함께 '바보회'를 결성해 노동법을 공부하고 실태를 조사했지만 노동청(현 고용노동부)은 이들의 호소를 외면했다. 1969년 9월부터 건축 노동자로 일하다 이듬해 4월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그는 '삼동친목회'를 새로 결성해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권리 개선을 시도했으나,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1970년 11월13일, 전태일은 항의의 뜻으로 분신을 택했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등 유언을 남기고 스스로 불꽃이 됐다. 전태일의 분신은 산업화의 그늘에 가려진 수많은 노동자의 삶을 드러내는 기폭제였다.
사진은 분신한 전태일의 장례식에서 가족들이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모습. /사진=우리역사넷
사회정의 향한 불씨가 되다
전태일의 희생은 단순한 사건을 넘어 노동운동의 전환점이 됐다. 청계천 일대에는 노동자들의 눈물이 모였고, 시민과 학생들이 연대했다. 평화시장에는 전국연합노조청계피복지부가 설립됐고, 민주노조 운동이 본격화했다. 정부와 사회도 뒤늦게 노동환경 개선과 법·제도적 보완 필요성을 인식했다.
55년이 지난 지금도 전태일의 이름은 '노동 존중'과 '인간다운 일터'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