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연으로 어렵게 모셨습니다."

일본 산리오의 오너 3세 츠지 토모쿠니 CEO가 쇠락하던 회사를 MZ 감각으로 부활시켜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내자 누리꾼들이 만들어낸 밈(Meme)이다. 타사에서도 탐낼 만한 인재를 혈연 덕분에(?) 대표이사로 영입할 수 있었다는 우스갯소리다. 그의 성공은 단순한 경영 세습을 넘어 능력 승계의 모범 사례로 한국 재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거 '낙하산'으로 폄하되던 오너 후계자들이 최근 유의미한 성과를 내며 기업의 운명을 바꾸는 사례가 늘고 있다. 내수 한계를 넘어 수출 기업으로의 도약이 절실해진 유통업계에서 젊은 감각과 글로벌 마인드를 갖춘 경영자의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유통가에서는 이명희 신세계그룹 총괄회장의 딸인 정유경 ㈜신세계 회장이 '모범 후계자'로 꼽힌다. 정 회장은 백화점을 단순한 쇼핑 공간이 아닌 '체험형 럭셔리 공간'으로 혁신했고,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과감한 리뉴얼을 단행하며 지속가능한 미래를 열었다. 그의 지휘 아래 신세계 강남점은 국내 단일 백화점 최초로 '연매출 3조 클럽'에 입성하며 세계적인 반열에 올랐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주목한 김정수 삼양식품 부회장은 전업주부에서 CEO로 변신해 위기의 회사를 구한 드라마틱한 주인공이다. 그가 만든 '불닭볶음면'은 '신화'가 되어 K라면 전성시대를 열었고, 삼양식품의 시가총액은 김 부회장 입사 이후 170배 이상 치솟았다. 최근에는 시아버지와 그룹을 위기로 몰아넣었던 과거 '우지 파동'의 아픔에 정면으로 승부하는 신제품까지 선보이며 묵은 과제를 쇄신하고 있다.


CJ헬스케어 M&A라는 빅딜을 성공시켜 그룹의 체질을 개선하고 실적 신기록 행진을 이끈 윤상현 콜마홀딩스 부회장도 있다. 콜마그룹이 최근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여러 차례 임시주총을 열었음에도 주주들이 번번이 그의 손을 들어준 것은, 오롯이 실력으로 얻어낸 신뢰 덕분이었다는 평가다.

성래은 영원무역홀딩스 부회장 역시 ESG 경영을 전면에 내세워 글로벌 트렌드를 선도한 인물이다. 패션 업계가 불황으로 줄줄이 적자전환할 때도 영원무역 그룹은 신규 수주와 함께 실적 최고 기록을 이어갔다. 기능성·고부가가치 의류 수주를 확대하며 외형 성장과 수익성을 동시에 끌어올린 것은 그의 핵심 성과 중 하나다.

최근 유통가에서는 30대 오너가 자제들의 '초고속 승진'이 화두다. 시장의 평가는 냉정하다. 승진의 속도 그 이상을 성과로 증명해야 하는 무거운 과제가 이들의 어깨 위에 놓여있다. '혈연으로 어렵게 모신 능력자'가 될지, 가진 거라곤 혈통뿐인 낙하산 경영자가 될지는 이제부터 이들이 내놓을 성적표에 달려있다.
황정원 산업2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