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의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태로 13년간 시행됐던 유통산업발전법의 대형마트 규제를 전면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회원들이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쿠팡 탈퇴 소비자행동 발대식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 김도우 기자
쿠팡의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태로 유통업계의 위기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13년간 시행됐던 유통산업발전법(유통법)의 대형마트 규제 전면 폐지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아 쿠팡의 독주 체제를 견제하고 무너진 유통 생태계에 '유효경쟁'을 복원하기 위한 최우선 과제라는 제언이다.
18일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머니S와의 인터뷰에서 "쿠팡의 현재 독주 체제는 2012년 도입된 유통산업발전법의 오프라인 규제가 낳은 '역설적 결과물'"이라고 진단했다.

서 교수는 "당시 지배적 사업자였던 대형마트의 손발을 묶어버린 사이, 쿠팡은 코로나19 특수와 막대한 자본력을 등에 업고 규제 사각지대에서 손쉽게 '1강'으로 성장했다"고 분석했다. 이어 "규제의 명분이었던 전통시장 활성화는 실패했고 오히려 식자재 마트 같은 변칙적 사업자만 배를 불리는 기형적 생태계가 조성됐다"며 "대기업 견제 등의 정치적 논리를 배제하고 낡은 족쇄를 푸는 것만이 근본적인 해법"이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핵심 해법은 '유효경쟁'(Effective Competition) 환경의 조성이다. 유효경쟁이란 특정 기업이 시장 가격이나 거래 조건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도록 충분한 경쟁 압력이 작동하는 상태를 말한다. 공정거래법상 독과점을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는 경제학적 개념이다.
리나 칸의 경고… "눈앞의 최저가, 독점의 독(毒)"
쿠팡은 대형마트 규제 이후 국내 유통업계에서 빠르게 1강의 자리에 올라 매 분기 실적 신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 쿠팡의 매출 규모는 50조원 규모로 전망된다. 2024~2025 쿠팡 분기별 실적 추이. /그래픽=강지호 기자
학계와 업계는 현재 국내 유통 시장에서 쿠팡에 대한 경쟁 압박이 사실상 사라졌다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 유효경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멤버십 인상 등 소비자 후생 저하뿐 아니라 납품업체에 대한 갑질과 시장 가격 교란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아마존 저격수'로 불리는 리나 칸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 전 위원장은 2017년 발표한 논문 '아마존의 반독점 역설'을 통해 "당장 눈앞의 싼 가격이 곧 소비자를 위한 길이라는 낡은 믿음을 버려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오직 가격표에만 매몰될 경우 거대 플랫폼이 시장을 완전히 장악한 뒤에 벌어질 잠재적이고 치명적인 해악을 놓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은 그동안 저술과 강연 등을 통해 "독점 플랫폼이 단기 저가 정책으로 시장을 장악한 뒤 공급망 생태계를 파괴할 수 있다"고 경고해 왔다. 이는 리나 칸 위원장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독점적 위치에 오른 플랫폼의 입점업체(셀러)들은 협상력을 잃고 종속된다는 의미다.

업계 관계자 A씨의 증언은 쿠팡의 최저가 정책이 소비자와 입점업체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는 "쿠팡은 직매입 상품의 가격을 스스로 최저가로 떨어뜨려 판매하고 그 차액을 셀러에게 광고비 명목 등으로 부담하게 한다"며 "이로 인해 가격비교가 일상화된 요즘, 같은 제품을 취급하는 대리점, 슈퍼마켓, 전문점 등 소상공인은 소비자들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대기업, 중소기업, 소상공인, 농어촌 생산자 할 것 없이 모두가 쿠팡과 거래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오롯이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그럼에도 다른 전략적인 선택지가 없다"고 업계의 현실을 토로했다.
대형마트 온라인·심야배송 폐지… '통합 경쟁 룰' 마련해야
이에 대형마트의 의무휴업일, 온라인 배송 금지와 심야배송 제한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마트, 롯데마트 등 대형마트가 보유한 전국 점포망을 도심형 물류 거점인 'PP(Picking & Packing)센터'로 활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영업시간 종료 후 문을 닫아야만 했던 전국 오프라인 점포가 24시간 물류 기지로 가동된다면 쿠팡이 점유율 83.4%를 차지하며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익일배송' 시장에 강력한 경쟁자가 투입되는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오프라인 유통만 옥죄는 낡은 규제 프레임에서 벗어나 온오프라인 사업자가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하는 '통합 유통 경쟁 룰'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업계 관계자 B씨는 "이제는 온오프라인 채널 구분보다 실제로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는지를 기준으로 규제를 재검토해야 한다"며 "같은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경쟁 환경도 비슷하게 맞춰야 특정 채널만 유리해지는 기형적 구조를 막을 수 있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