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넘보며 고환율 국면이 길어지자 정부가 연일 관리 메시지를 내놓고 있다.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이 외환시장 대응에 나섰고 금융당국은 해외주식 투자와 외화 수급 실태 점검을 강화했다.
환율 급등의 원인으로 해외주식 투자 확대, 이른바 '서학개미'의 외화 수요가 거론되자 금융당국은 증권사에 해외주식 거래 관련 마케팅 자제를 요청, 개인투자자가 보유한 해외주식을 팔고 국내주식에 투자하는 경우 양도소득세를 일정기간 감면해 주는 초강수도 뒀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대책은 많지만 불안은 줄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온다. 윤 전 원장은 이러한 대응을 두고 "근시안적인 처방"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환율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라며 "지금 한국 경제는 계산 가능한 리스크가 아니라 언노운(Unknown·미지)의 영역'에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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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크가 아니라 언서턴티… 환율은 '신뢰 테스트'다"━
그럼에도 최근의 고환율 상황에 대해 "과거의 경험으로 가늠하기 어려운 국면"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위기는 기존의 위기 대응 공식이 작동하지 않는 '언서턴티(Uncertainty·불확실성)'가 지배하는 상황이라는 진단이다.
그는 "'리스크(Risk·위험)'는 과거 경험을 통해 확률 분포를 대략 알고 평균·분산 등을 추정해 관리할 수 있는 영역이지만 현재 한국이 마주한 문제는 처음 겪는 것, 분포를 모르는 것에 가까워 전통적 위험관리 도구만으로는 설명도, 해법도 부족하다"고 강조했다.
실제 당국은 최근 환율 급등세에 대해 이례적으로 강도 높은 구두 개입에 나섰다.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은 지난 24일 서울 외환시장 개장과 동시에 "원화의 과도한 약세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내놨고 이에 이날 원/달러 환율은 전일 대비 33.8원 급락한 1449.8원에 주간거래를 마쳤다.
하지만 윤 전 원장은 이러한 단기적 반응에 환율 문제의 본질이 가려져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의 환율 흐름을 단순한 변동성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으로 상승 압력이 깔린 '상승 국면' 자체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배경으로 윤 전 원장은 대외 환경의 급격한 변화를 짚었다. 그는 트럼프발 관세 장벽 강화 가능성과 첨단전략산업을 둘러싼 글로벌 투자 경쟁을 대표적인 요인으로 꼽으며 "향후 매년 일정 규모의 부담이 추가되는 구조가 시장에 깔려 있다"고 지목했다.
이어 "그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에 대한 물음이 생기고 국내에서 조달하든 해외에서 조달하든, 그 과정에서 취약성에 대한 우려가 커질 수 있다"고 부연했다. 결국 환율은 숫자의 게임이 아니라 국가가 불확실성을 관리할 역량과 신뢰를 갖추고 있는지를 시험하는 무대가 됐다는 진단이다.
문제는 이런 우려가 시장에서 '변동성 지표'로 즉시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는 "잘 보이지 않는 불안이 누적되면 투자자들은 '원화 자산을 더 들고 가도 되나'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며 "그 심리가 환율에 반영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내 변수로는 정부의 첨단전략산업 드라이브, 특히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 등 대규모 투자 구상과 재원 조달·집행의 불확실성을 지목했다. 윤 전 원장은 "AI(인공지능)·반도체 등 첨단 분야에 투자하겠다는 방향성은 이해하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몇 등을 달성하겠다' 같은 구호가 앞서면 투자자 입장에서는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금액이 작은 실험이면 실패해도 버리면 되지만 규모가 커질수록 실패의 비용이 커지고 국가 신뢰가 흔들릴 수 있다"며 "앞뒤가 맞는 큰 틀의 로드맵 없이 밀어붙이면 '언서턴티'는 더 커진다"고 말했다. 결국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일수록 '성공 선언'이 아니라 '실패확률을 낮추는 설계'가 먼저라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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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옵션을 사는 조직… 단계적 투자로 '살아남는 전략'━
복수의 선택지를 가지고 있으면 하나의 선택이 잘못될 경우 다른 선택지로 시선을 옮길 수 있어 위기 확산의 조기 차단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이 과정에서 단계별로 투자금을 배분하는 '스테이지드 파이낸스(Staged finance)'가 중요하다고 봤다.
그는 "핵심은 빨리 이기려 하지 말고 크게 이기려 하지 말고 끝까지 살아남는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윤 전 원장은 "특히 규모가 커질수록 1등을 노리고 몰빵하면 망할 확률도 커진다"며 "복수의 대안을 끌고 가며 비교하고 조정하는 것이 정부 투자"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전면전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줄여가며 경쟁력을 키우는 방식이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심리 안정에도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다.
윤 전 원장은 경제 운영의 큰 방향을 '쌍끌이 전략'으로 정리했다. 첨단산업 투자로 성장동력을 키우는 한편 내수 활성화 및 양극화·빈곤 등 사회의 구멍을 방치하지 말고 포용금융·복지 기반을 함께 보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과정에서 금융감독 체계의 신뢰도 중요하다고 짚었다. 윤 전 원장은 "금융 시스템의 리스크를 관리하려면 제도와 조직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한다"며 "감독은 현장을 이해하는 전문성을 바탕으로 운영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감독 체계의 연속성과 전문성이 흔들리면 메시지 역시 시장에서 신뢰를 얻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그러면서 "금융감독을 총괄하는 금융감독원 원장의 경우도 오랜 기간 전문성을 갖춘 내부 출신 인사를 선임해 연속성과 전문성을 키우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외부 인사의 경우 전문성을 갖췄더라도 적응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에서다. 금융감독원은 1999년 통합감독기구로 출범한 후 26년째를 맞았는데 아직 내부 출신 원장을 한번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금융당국이 언급해온 부동산·수도권·은행 쏠림 문제에 대해서도 "문제 진단은 맞지만 해법이 늘 같은 얘기여선 안 된다"고 했다. 방향성에 공감하더라도 이전과 다른 실행의 디테일이 제시되지 않으면 시장은 다시 불안해진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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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율은 경제 전반을 흔든다… 정부가 액션플랜을 먼저 내놔야"━
나아가 "옵션은 변동성이 커질수록 가치가 올라간다"며 "실물 옵션을 많이 갖고 있을수록 국가의 대응력이 커진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런 요소들을 모아 점수표처럼 제시하면 국내외 투자자들이 '한국은 몰빵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받게 되고 불안이 줄어든다"고 했다. 환율·금리·물가·해외조달 여건 등으로 이어지는 연쇄 충격을 줄이려면 단기 처방보다 '신뢰를 만드는 구조'가 먼저 필요하다는 메시지다.
윤 전 원장은 "환율은 피부에 잘 와닿지 않지만 금리·물가·해외자금 조달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는 핵심 변수"라며 "정부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듯하지만 이걸 잡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정교한 액션플랜을 단계별로 설계해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경제의 관건은 결국 환율을 '방어'하는 기술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관리'하는 신뢰에 달려 있다는 결론이다. 윤 전 원장은 "큰 틀과 로드맵이 먼저 서야 기업과 금융이 각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며 "지금처럼 단기 처방에 몰두할수록 불안은 커질 수밖에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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