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극도로 불안한 경제상황이 계속되고 있으며 이런 불확실한 시대에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도박이다!"

"비상경영시스템을 구성하고 구체적 액션 플랜을 수립하라!"


지난 6월28일 롯데백화점 경기도 평촌점. 신동빈(57) 롯데그룹 회장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48개 계열사 대표와 롯데정책본부 임원 등 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사장단회의 자리에서다.

신 회장은 “지난 몇 년간 롯데는 국내·외의 대형 인수합병(M&A)을 바탕으로 빠른 속도로 성장해 왔지만 너무 앞만 보고 왔다”고 언급한 후 “하반기에는 어떤 상황이 우리에게 닥칠지 예상할 수 없는 만큼 방심하지 말고 최악의 상황(Worst case)에서 모든 것을 대비해달라"고 주문했다. 일종의 ‘비상경영체제’를 선포한 발언이다. 

평소 직설적인 화법을 피하는 신 회장이기에 그의 이번 ‘제스처’를 놓고 재계의 시선은 온통 롯데에 쏠렸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에서 시작된 글로벌 경제위기나 국내 소비경기 침체에 따른 ‘비상경영 선포’이기에 앞서 롯데 주요 계열사들의 실적이 최근 들어 악화일로를 걷는 상황에서 나온 발언이기 때문이다. 


 


◆계열사 실적 ‘추락’에 고민 늘어

실제 롯데그룹 주요 계열사들의 실적 추락은 수치상으로도 확인되고 있다. 롯데쇼핑과 호남석유화학, 케이피케미칼 등은 전년 대비 올 1분기 매출 및 영업이익 부문 실적에서 눈에 띄는 하락세를 보였다. 

화학계열사인 케이피케미칼의 추락이 가장 확연하다. 이 회사의 지난 1분기 매출액은 1조1886억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5% 하락했다. 영업이익은 441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무려 81%나 감소했다.

호남석유화학의 실적 흐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올 1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2.2% 감소한 3조8503억원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도 2196억원으로 전년 동기에 비해 62%나 떨어졌다.  

롯데의 부진은 비단 석유화학 계열사만이 아니다. 핵심계열사인 롯데쇼핑이나 롯데마트, 롯데삼강 등도 비슷한 실정이다. 

지난해 롯데그룹 매출 중 44.8%를 차지한 롯데쇼핑은 올 1분기 5조9919억원의 매출액을 올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9% 가량 수치가 늘었지만 영업이익(3649억원)에서는 전년 동기보다 19% 하락했다.

롯데마트 역시 상반기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약 1.5% 줄었다. 특히 한 달에 두 번씩 일요일에 문을 닫는 의무휴무제가 전국 지방자치단체로 확산되면서 영업환경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처지다.

그나마 롯데삼강이 매출과 영업이익에서 각각 48%와 84%로 두 자릿수 성장률을 보이며 선전하고 있지만 이 마저도 롯데삼강이 지분을 100% 보유한 (주)웰가를 올 1월1일 합병하면서 나타난 일시적 현상이라는 게 증권가의 해석이다.
 


◆비상경영 시스템, 어떻게?

신 회장이 주문한 롯데그룹의 비상경영시스템은 일단 원가 및 비용 절감과 세심한 투자 전략 중심으로 재편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사장단회의에서 원가·비용 절감 계획을 수립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세부 방침을 지시했고 새로운 사업을 추진할 때에도 정확한 투자심사분석을 고려하라고 강조했다.

당시 신 회장은 “투자심사분석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며 “프로젝트별로 단계별 투자 계획을 세워 잘못된 판단일 경우 언제든 빠져나올 수 있는 출구전략(Exit Plan)도 함께 준비하라”고 당부했다.

이와 함께 신 회장은 해외에 진출한 식품회사는 적극적으로 선도 상품을 육성하고 유통회사는 상품 구색과 통합 매입 비중을 대폭 개선해달라고 강조했다. 석유화학회사는 공장 가동률과 생산효율을 올릴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첫 M&A 실험대는 하이마트, 웅진코웨이?

공교롭게도 신 회장이 비상경영시스템 구축을 지시한 지 일주일 만에 롯데는 물 건너간 것으로 여겼던 하이마트를 극적으로 품에 안았다.   

지난 2일 하이마트 인수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MBK파트너스가 배타적협상 기한을 넘겨서도 본계약을 체결하지 않고 인수를 포기, 자연스레 롯데쇼핑이 우선협상자 지위를 부여받았고 6일 1조2480억원에 인수계약을 체결했다. 

따라서 속도전에 집중하지 말라고 당부한 신 회장의 입김이 이번 하이마트 인수전에 어떤 변수로 작용했는지 관심이 모아진다.

롯데쇼핑이 하이마트를 인수함에 따라 국내 최대 유통기업인 롯데그룹의 시장 지배력은 더욱 커지게 된다. 특히 가전 유통시장에서만 단숨에 매출 5조원에 육박하는 거대 유통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하이마트 인수 건과 함께 신 회장의 비상경영체제에 대한 ‘시험대’는 최근 눈독을 들이고 있는 웅진코웨이의 인수전에서도 일정부분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롯데가 정수기 업계 1위 웅진코웨이를 인수할 경우 1만7500여명의 방문 판매 조직을 활용해 향후 유통과 카드 사업에서 비즈니스 기회가 크게 확대되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 웅진코웨이 인수에 대한 롯데의 움직임은 하이마트 인수를 위한 마무리 작업을 사실상 끝내고 웅진코웨이 인수에 전력을 기울인다는 관측이 있는가 하면, 신 회장의 주문에 따라 무리한 인수전략을 취하지 않고 입찰에 형식적으로 참여할 가능성도 있다는 해석이 공존하고 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3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