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관리비가 알 수 없는 용도로 쓰이고 몰래 누군가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면 아파트 입주민으로서 이보다 더 열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관리비로 제 잇속을 챙기고 누군가의 배를 불리기 위해 꼼수를 부리는 이들은 어떤 수법들을 동원할까.
대한민국 아파트라는 정글,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해답을 찾고자 마련한 기획연재 <아파트에서 살아남기>. 이번 시간에는 아파트 관리비와 관련한 모든 것을 파헤쳐봤다.
◆관리비, 아파트 비리의 온상
지난달 26일 고양시 일산동구 소재 한 아파트 관리소장 A씨는 하자보수대금을 부풀리는 수법으로 관리비 1억3000여만원을 빼돌린 혐의로 적발됐다. 같은 날 파주지역 한 아파트 단지에서는 관리사무소 직원 B씨가 모 용역업체 대표이사와 짜고 일명 ‘공차(空車) 돌리기’ 수법으로 이 아파트 정화조의 분뇨수거량을 부풀려 4800여만원을 몰래 빼돌려온 것이 들통 났다.
경찰청은 지난 6월부터 관리비 횡령 등 아파트 비리 특별단속을 벌여 164건을 적발, 관련자 581명을 검거하고 5명을 구속했다고 밝혔다. 적발된 횡령·금품수수액만 64억원에 달했다. 한집 걸러 한집꼴로 관리비 비리가 벌어진다는 말이 괜한 것만은 아니다.
아파트에서 가장 널리 퍼져있는 비리 중 하나는 ‘공사’다. 아파트가 완공된 후에도 공사는 끝나지 않는다. 하자나 파손이 발생하면 보수를 해야 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새로운 시설을 설치하거나 기존 시설을 업그레이드할 필요도 생긴다.
아파트에서 이른바 ‘돈세탁’을 통해 자금을 만들고 챙기기에 가장 손쉽고, 많은 돈을 챙길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공사업체와 결탁하는 것이다. 널리 쓰이는 방법은 ‘공사비용 뻥튀기’다. 자재의 양이나 질을 속이거나 인부의 수를 속이거나 하는 식이다. 필요한 공사에 불필요한 공사를 슬쩍 끼워 넣어서 규모를 부풀리는 방법도 있다.
공사에 관련된 비리가 만연한 만큼 이를 막기 위한 장치도 물론 있다. 총 액수가 200만원이 넘는 사업의 경우 공개경쟁입찰방식으로 업체를 결정하게끔 돼있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이런 장치는 손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다. 최근 서울의 C아파트는 입주자대표회의(입대의)와 관리사무소가 3억원짜리 공사를 190만원짜리 공사 150여건으로 쪼개 수의계약을 해버리는 식으로 리베이트비용을 챙기다 적발된 바 있다.
덩치가 더 큰 경우에는 입찰담합을 하는 방법도 있다. 이미 공사를 맡기로 낙점을 받은 업체가 공개입찰에 필요한 최소 업체 수만큼 다른 업체를 섭외하고 미리 입찰가를 짜고 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입찰가를 보면 사이좋게 몇만원씩밖에 차이가 안 나는 경우가 많다.
과거 인천의 D아파트의 경우 이러한 담합을 위해 아예 입찰공고를 엉뚱한 사이트에 내서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도 했다. 담합업체와 관계없는 다른 업체가 입찰에 뛰어들 것을 미연에 방지한 차원이었다.
해당 아파트 입주자 김모씨는 “그래놓고서는 ‘공고를 했으니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으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다행히 지난해 7월부터는 국토교통부를 통해서 입찰공고를 낼 수 있게 바뀌어서 이러한 수법은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 물론 입대의의 서류심사가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 과정에서부터 차단이 가능하다.
<아파트에서 살아남기> 저자 김효한 대표는 “입주민은 입찰공고 등과 관련한 서류를 열람할 권리가 보장돼 있으며, 만약 열람을 거부하는 관리사무소나 입대의는 의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1/n의 함정에 걸려들지 말 것
공사대금처럼 한번에 거액이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관리비 내역에서 보통 별 생각 없이 지나가는 항목으로는 ‘장기수선충당금’이 있다. 장기수선충당금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어디가 어떻게 망가질지 모르니 미리 걷어두는 차원에서 모으는 관리비다.
수도권 아파트의 평균 금액은 제곱미터당 87원. 전용면적 105㎡ 기준으로 9135원이다. 가구당 매달 이 돈을 적립한다면 1000가구 아파트에서 매월 적립되는 금액은 900만원 이상이다. 1년이면 1억원이 훌쩍 넘는다.
1년에 1억원짜리 공사를 매년 하는 아파트는 찾아보기 힘들 터. 최근엔 이 금액을 최대한 많이 걷어 보수업체나 공사업체와 결탁한 뒤 ‘한방에 해먹고’ 튀는 사례가 늘고 있다. 조금씩 오랫동안 모아놓은 돈이기 때문에 없어져도 입주민은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점을 노린 것이다.
전기료 조작 역시 부패한 아파트 단지의 가장 흔한 수법 중 하나다. 한국전력과 아파트 단지가 단일계약을 체결한 경우, 한전은 아파트 전체 사용량을 가지고 총액만 계산해서 단지에 통보한다. 개별가구별로 사용량을 분리해서 통보하지 않기 때문에 입대의와 관리사무소가 결탁할 경우에는 갖가지 방법을 써먹을 수 있다. 입대의 임원들이 내야할 전기료를 다른 가구들에게 조금씩 전가해서 임원들은 전기료를 거의 내지 않는 경우도 있다.
무심코 지나가기 쉬운 아파트 잔디밭 안에 심어진 나무들도 관리비로 산 것들이다. 보통 나무의 지름은 R로 표기하는데 50R(지름 50cm)짜리 장송의 가격은 한 그루에 1000만원에 이른다. 반면 35R짜리 소나무 가격은 500만원이다. 무려 두배가 차이나지만 보통 사람들은 50R과 35R의 차이를 구분하기 쉽지 않다. 나무는 한그루의 값이 비싼 만큼 마음만 먹으면 상당한 돈을 빼먹을 수 있는 관리 대상이다. 단지에 심어져 있는 나무 하나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동통신사 중계기 설치나 쓰레기 분리수거는 ‘몰라서’ 당하기 쉬운 부분이다. 중계기를 설치하고 쓰레기를 처리하는 데 입주민이 돈을 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업체 측에서 아파트 단지에 돈을 준다. 두가지 모두 민간업체의 이득이 관련된 문제기 때문에 아파트 공간을 사용하는 쪽에서 지불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적정가격이나 시세를 알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에 비리가 끼게 될 확률이 높다.
청렴한 관리비 실천으로 지역주민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인천 청라지구의 E아파트 입대의 관계자는 “‘모르는게 약’이라는 말은 아파트 관리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며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몇천원쯤, 혹은 몇만원쯤 된다고 간과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입대의와 관리사무소를 감시하고 압박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0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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