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터 임종철
과거 인기리에 방영됐던 예능프로그램 <엑스맨>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한 연예인이 엑스맨으로 지정되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소속팀이 승리하지 못하게 하는 미션을 받아 수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이러한 엑스맨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공간, 아파트에도 존재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 업계 최초로 ‘입주자 엑스(X)’라는 용어를 만들고 설파 중인 <아파트에서 살아남기>의 저자 김효한 대표는 입주자 엑스가 모든 아파트에 존재한다고 단언한다. 나아가 이 입주자 엑스에 의해 최악의 경우 아파트 전체가 흔들리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엑스맨 활동, 은밀하게 치사하게

과연 입주자 엑스란 어떤 존재며, 어떤 활동으로 입주자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일까. 2주간에 걸친 취재 결과 입주자 엑스로 의심될 만한 이들과 관련한 다양한 사례를 접수받을 수 있었다. 그중 입주자 엑스의 가장 대표적인 방식이라는 한 사례를 살펴보자.

경기도 인천의 A아파트에 입주한 이모씨는 최근 이름도 어려운 ‘하자보수보증금 청구소송’을 마쳤다. 통상 건설사는 아파트 건설비의 3%를 하자보수보증금으로 대한주택보증에 맡긴다. 이 점을 들어 입주예정자대표회의(이하 입대의) 대표 주모씨는 하자보수 소송을 하면 주인 없는(?) 수십억원의 보증금을 한꺼번에 받아낼 수 있다며 불도저 같이 입주자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마침 아파트 벽면 누수가 골치 아팠던 터에 소송에서 이기면 목돈이 생긴다고 하니, 이씨를 비롯한 입주자들은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도 모른 채 동의를 했다.

그리고 며칠 뒤 입대의 대표가 데려온 변호사는 30억원가량을 받아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하자 진단부터 소송, 수령까지 턴키로 다 해주면서 후불제로 수임료를 받겠다고 하니 제법 믿음직스러웠다. 하지만 소송 후 30억원을 찾아준다고 약속했던 변호사가 받아온 돈은 수임료를 제한 고작 1억원 수준. 가구별로 나누고 나니 벽지도 못 바르는 10만원가량만이 수중에 떨어졌다.


입대의 대표가 변호사 브로커와 얼마를 나눠가졌다느니, 건설사로부터 거액의 외제차를 받았다는둥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어 물이 새는 벽만 하염없이 바라볼 뿐 입대의 대표를 이제 와서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식의 소송을 진행하는 것이야 말로 건설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나리오인 동시에 보통 입대의 대표로 상주하고 있는 입주자 엑스의 가장 큰 역할 중 하나라고 김 대표는 주장한다.

소송 보상금으로 지불하는 액수 자체가 업체 입장에선 워낙 적을뿐더러 사실상 자신들이 피 흘려 내는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불어 소송을 마치고 나면 앞으로의 책임까지 훌훌 털어버릴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는 것.

이밖에 입주자 엑스로 의심되는 경우로 제보된 사례를 살펴보면 ▲소송만이 답이라며 강한 투쟁을 외쳐 사람들을 모아놓고 소송 직전 행방을 감춤 ▲분양광고 리플렛에 등장한 인기모델이 실제로 분양 받고 입대의를 구성, 대표가 된 뒤 건설사에 유리한 면만 선전 ▲하자보수 소송에 부분 승소해 받은 하자보증금 수십억원을 업체에게 다음 날 전액 이체 등이 존재한다.

김 대표는 “정체불명이라는 뜻의 엑스(X)를 붙인 것은 실제로 그들의 정체를 뚜렷하게 까발리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라며 “계속해서 입주자 X를 관찰한 후 내린 결론은 아파트 분양이 시작될 때부터 ‘준비된’ 입주자 X가 ‘투입’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직업적인 입주자 X가 존재한다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들의 대표적인 미션은 입주예정자들이 모두 입주를 마치게끔 하는 것”이라면서 “입주가 완료된다는 것은 입주자들이 잔금을 다 치러서 시행사와 건설사로서는 받을 돈을 다 받고 여러 가지 책임에서 해방되는 것을 뜻한다”고 덧붙였다.

◆“마치 어용노조 보는 듯”

앞서 살펴본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입주자 엑스는 입주자들 중에서 유난히 시행사 또는 건설사 쪽에 유리한 말이나 행동을 하고 다른 입주자들을 그와 같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려는 사람들을 뜻한다.

이들은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다. 직업도 직장인에서부터 자영업자, 무직까지 가지각색이다. 성격이나 행동하는 패턴도 다양하기 때문에 누가 입주자 엑스인지를 판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전문위원은 “입주자 엑스라는 존재에 대한 가설 자체는 가능성이 있어보이지만 실제 겉으로 분명히 드러난 사례가 아직 없다”면서 “입주자 가운데 누군가가 개별적인 성격상 벌인 행동이 잘못 해석돼 입주자 엑스로 낙인찍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확대해석과 음모론을 경계했다.

김 대표의 주장에 따르면 입주자 엑스는 주로 입주 전 인터넷 카페에서부터 활동을 개시한다. 각 가구주의 연락처까지 알아내 전화를 걸고 카페 가입을 권유하기도 한다. 이런 식의 활동으로 은근슬쩍 리더가 된 입주자 엑스는 분양 직후 어수선한 분위기일 때 자신의 지위를 굳히기 위해 분주히 노력한다.

입주자 엑스를 분별할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은 ‘3무’다. 무조건, 무차별적으로, 무리하게 일을 진행하려는 습성이 있다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 업체와 입주자들 사이에 트러블이 생기면 논리를 앞세워 해결 방안을 찾고자 모색하지만, 입주자 엑스는 패배주의를 내세워 업체와의 싸움을 사전에 막거나 업체에게 유리한 쪽으로 흐름을 몰고 간다. 이것이 통하지 않을 시 때로는 폭력을 일삼을 정도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마치 ‘나에겐 이러한 일을 반드시 해야 하는 책임이 있어’라는 느낌을 줄 정도다.

이들은 임무를 마치면 또 다른 임무처로 자리를 옮기기도 한다. 김포의 K아파트에 입주 중인 한모씨는 “우리 아파트의 경우 입주자들로부터 입주자 엑스(당시에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로 낙인찍힌 입대의 대표가 있었다”며 “어느 날 입주 과정에서 홀연히 사라지더니 옆 동네 다른 아파트에서 똑같이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박상언 유앤알컨설팅 대표는 “입주자 엑스라는 미지의 존재는 기업의 어용노조와 같은 성격으로 판단된다”며 “업체가 분양 전 단계에서부터 미리 작전세력을 심어놨을 가능성이 있으니 미연에 조심할 순 있으나 이를 증명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0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