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시장의 패권을 쥐고자 하는 국가들은 글로벌 경제위기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기술혁신과 신산업 발굴을 위한 R&D 투자를 지속하고 있다. 실제로 선진국들의 R&D 투자는 소폭이라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신흥국들은 대규모 투자로 기술경쟁력 확보를 위해 노력 중이다.
특히 중국은 R&D 투자규모에서 2009년 이미 일본을 제치고 이제 미국을 뒤쫓고 있다. 더 이상 싼값의 인건비만으로 승부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엿보인다. 풍부한 노동력에 혁신적인 기술까지 갖추려는 중국에 맞서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정부는 원천기술 R&D 지원에 적극 나섰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은 GDP(국내총생산) 대비 R&D 지출 비중과 고용인구 중 해당인력 비중을 높여나가며 R&D의 양적 성장을 이뤄가고 있다. 하지만 질적인 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위기업 의존도가 너무 높고 신성장 동력 창출의 필수요소인 원천기술 연구개발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은 상태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얘기다.
김문태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원의 도움을 받아 글로벌 R&D 현황과 한국의 현주소를 짚어봤다.
美-中, R&D 2강 체제 구축…투자규모 '甲'
미래시장을 주도하기 위해 전세계에서 R&D에 가장 많은 '판돈'을 건 국가는 단연 미국이다. OECD의 지식경제글로벌포럼에서 발표된 'OECD 과학·기술·산업 스코어보드 2013'에 따르면 미국의 R&D 지출 규모는 3663억달러(이하 2011년 기준)로 글로벌 1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의 눈은 1위 미국이 아닌 2위 중국을 주목하고 있다. 현재 중국의 R&D 지출규모는 1830억달러. 눈여겨봐야 할 점은 중국의 R&D 지출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국가경제가 성장세를 유지하면서 2011년 R&D 지출이 2007년 대비 약 두배 늘었다. 반면 미국의 경우 금융위기가 발발한 2008년 이후 실질단위(물가 변동 요인을 배제한 화폐 가치, Real terms)기준으로 R&D 지출총액이 감소세를 이어가고 있다. 저돌적인 중국이 미국과의 격차를 빠른 속도록 좁혀나가고 있는 모양새다.
그런가하면 2009년부터 R&D 지출규모로 중국에 밀린 일본은 장기적인 경기침체 영향으로 기업의 R&D 활동이 부진한 상태다. 일본의 2011년 R&D 지출은 1332억달러로 2007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3위에 머물러 있다.
미·중·일에 이어 R&D 지출규모 4, 5위를 차지하고 있는 독일과 한국의 경우 2011년 각각 R&D에 총 815억달러, 552억달러를 썼다. 중국 이외의 다른 브릭스 국가들의 R&D 지출 증가세도 주목된다. 러시아가 8위(230억달러), 인도가 9위(228억달러), 브라질이 10위(228억달러)를 차지한 것. 중국을 포함한 브릭스가 R&D 지출규모 10위권 안에 들면서 글로벌 R&D 시장의 주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와 관련 김문태 연구원은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3개국이 5위 안에 든 것은 세계 R&D시장에서 동아시아의 역할이 그만큼 커졌음을 방증한다"며 "특히 중국을 포함한 브릭스 국가들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한편 하나금융경영연구소가 OECD 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글로벌 R&D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OECD 국가들의 GDP 대비 R&D 비중(R&D 경제적 집약도)은 2.37%이며, 한국은 년 4.0%를 기록하며 1위인 이스라엘(4.38%)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2001년 2.47%로 8위에 그쳤던 한국이 이후 10년간 6단계 순위가 상승한 것이다. 핀란드(3.78%), 일본(3.39%), 스웨덴(3.37%), 아이슬란드(3.11%), 덴마크(3.09%) 등이 한국의 뒤를 잇는다.
총규모면에서 압도적 우위를 보인 미국은 2.77%의 GDP 대비 R&D 집약도를 기록했으며, 높은 R&D 지출 증가율을 보인 브릭스 국가들의 GDP 대비 R&D 집약도는 중국(1.84%), 러시아(1.09%), 인도(0.76%), 브라질(1.16%) 등으로 OECD 평균보다 낮았다.
노동력의 집중도를 나타내는 고용인력 1000명당 R&D 인력수(스태프 제외한 순수연구원, 2011년 기준)는 아이슬란드가 17.1명으로 1위를 차지했고 핀란드(15.9명), 덴마크(13.4명)가 뒤를 이었다. 한국은 11.9명으로 집계 국가 중 4위다. 미국과 중국, 일본은 각각 9.5명, 1.7명, 10.2명으로 조사됐으며 해당 통계집계에서 이스라엘은 제외됐다.
원천기술에 집중하는 유럽…佛·英·伊 '주도적'
규모면에서는 미국, 중국, 일본에 밀리지만 먼 미래 먹거리를 위한 원천기술 R&D에 집중, 차별화된 역량을 쌓고 있는 곳도 있다. R&D 지출규모 각각 6, 7, 12위를 차지한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얘기다.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정부 재원에 바탕한 R&D 비중이 비교적 높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기업 R&D 비중이 높은 국가의 경우 쉽게 상품화할 수 있는 개발분야의 R&D 비중이 높은 반면, 정부 주도하의 R&D 비중이 높은 국가의 경우 단기적 성과실현이 어려운 과학기술 및 기초과학 R&D 비중이 높게 나타난다.
연구주체별 R&D 비중(OECD 과학·기술·산업 스코어보드 2013)을 살펴보면 이스라엘과 동아시아 3국(한·중·일)은 기업에 의한 R&D 비중이 높다. 전체 R&D 지출에서 기업에 의한 R&D 지출 비중은 이스라엘(80.25%), 일본(77.0%), 한국(76.5%), 중국(75.7%) 순으로 나타났다. 특히 한국은 GDP 대비 민간기업 R&D 투자비율이 이스라엘에 이어 2위다.
반면 프랑스(63.4%), 영국(61.5%), 이탈리아(54.2%) 등은 기업부문의 R&D 투자 비중이 낮게 나타났다.
이 같은 연구 주체의 차이는 각국별 연구 분야의 차이로 나타난다.이스라엘과 한중일 3국은 개발(Experimental Development) 분야의 R&D 비중이 높았으며 프랑스·영국·이탈리아 등은 기초연구(Basic Research), 응용연구(Applied Research) 분야의 R&D 비중이 높게 나타났다.
김문태 연구원은 "평균적으로 한 국가의 R&D 투자규모 가운데 정부재원은 약 30% 내외로 민간재원이 나머지 70%를 차지한다"며 "통상 정부재원은 높은 산업위험 속에 투자부담이 있지만 단기적 성과실현이 어려운 과학기술 및 기초과학에, 민간재원은 산업의 생태계가 어느 정도 조성된 상황에서 조만간 도래할 현금창출력이 높은 산업에 투입된다"고 설명했다.
민간부문에서 글로벌 R&D를 주도하는 대표 기업들로는 폭스바겐과 삼성전자, 마이크로소프트(MS) 등이 꼽힌다.
EC의 2013년 R&D 스코어보드에 따르면 2012년 한해 동안 R&D 투자에 적극적인 전세계 2000개 기업 가운데 R&D에 가장 많은 돈을 투입한 기업은 폭스바겐(95억유로)인 것으로 조사됐다. EU기업이 해당 순위 1위에 오른 것은 2004년 이후 처음이다.
폭스바겐에 이어 R&D 지출 규모 2위를 차지한 기업은 한국기업인 삼성전자(83억유로). 삼성전자는 마이크로소프트(79억유로), 인텔(77억유로), 토요타(71억유로)보다 더 많은 돈을 썼다.
조사대상 업체를 보면 미국기업이 658개로 가장 많고 일본(353개), 독일(130개), 영국 (107개), 중국(93개) 기업들도 대거 포함됐다. 여기에 포함된 한국기업은 56개.
2000개 기업이 지출한 R&D 투자액은 총 5387억6380만유로다. 국가별로는 미국기업이 지출한 액수가 35.8%로 가장 많았다. 다음은 ▲일본기업 19.3% ▲독일기업 8.9% ▲프랑스기업 5.3% ▲영국기업 4.3% ▲스위스기업 4.2% ▲한국기업 3.3% ▲중국기업 3.1% 순이었다.
특히 한국기업이 지출한 R&D 투자액은 총 175억원인데 이 중 절반(48%)가량이 삼성전자 주머니에서 나왔다. 국내 민간부문 R&D가 삼성전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얘기다. LG전자(11.2%), 현대차(5.3%)와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한국기업 56개의 R&D 투자규모 표준편차는 11억유로로 스위스(13억유로)보다 작고, 독일(9억유로), 핀란드(8억유로), 대만(2억유로)보다 컸다.
이주완 하나금융연구소 산업경제팀장은 "한국의 경우 삼성전자가 빠지면 R&D 규모와 집약도 등 모든 지표가 곤두박질치게 되는 상황"이라며 "한국 R&D 지출 관련 대부분의 지표가 우수하게 나온 것은 국가 전체의 경쟁력이 아닌, 한 기업의 경쟁력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될 경우 삼성전자 실적악화 시 관련 지표가 크게 하락할 것으로 우려된다는 게 그의 견해다. 이주완 팀장은 "문제는 국내 R&D 체질이 이러한 구조로 굳어질 경우 앞으로 삼성전자가 집중하지 않는 분야의 R&D는 국가 전체적으로도 취약해질 수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0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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