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은 지난해 12월 국내주식 거래 증권사를 선정할 때 재무안정성을 평가하는 NCR 적용기준을 450% 만점에서 250% 만점으로 바꿨다. 덕분에 각종 규제와 바닥으로 떨어진 거래량으로 신음하던 증권가에 "오랜만에 호재가 떴다"는 평가가 나왔다.
규제완화 결정이 나오기 한달여 전 증권업계 관계자는 "업계를 살리려면 NCR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관계자의 말처럼 이번 규제완화가 '앞날이 보이지 않는' 증권업계를 살리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 너무 높은 NCR이 문제?
NCR은 영업용순자본(유동성 자기자본)을 총위험액으로 나눈 지표다. 은행의 BIS(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와 유사하게 증권사의 재무건정성 지표로 활용된다.
금융당국은 NCR이 150% 미만일 경우 경영개선 권고, 120% 미만이면 경영개선 요구, 100% 미만일 땐 경영개선 명령을 내린다. NCR이 150%만 넘으면 문제 없다는게 당국의 입장이지만, 증권사들의 NCR 비율은 이보다 훨씬 높다.
한국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9월 말 현재 국내 63개 증권사(해외 증권사 지점 포함)의 NCR 비율은 평균 675.1%다.
이 가운데 에스지증권 서울지점이 2873%로 가장 높았으며 ▲코리아에셋투자증권(1796%) ▲비오에스증권(1776%) ▲크레디트스위스증권 서울지점(1539%) ▲한국스탠다드차타드증권(1518%) ▲유비에스증권리미티드 서울지점(1432%) ▲제이피모간증권 서울지점(1327%) ▲메릴린치인터내셔날인코포레이티드증권 서울지점(1270%) ▲비엔피파리바증권(1216%) ▲모간스탠리인터내셔날증권 서울지점(1078%) ▲씨티그룹글로벌마켓증권(1025%) ▲유화증권(1010%) 등 총 12개 증권사의 NCR비율이 1000%를 넘는다.
지난해 말 옵션시장에서의 주문실수로 사실상 파산한 게 아니냐는 얘기가 흘러나오는 한맥투자증권의 경우 NCR 비율이 296%이고, 청산을 결정한 애플투자증권 역시 275%로 모두 기준을 초과한 상태다.
대한민국 증권사 가운데 NCR 비율이 가장 낮은 리딩투자증권도 255%다. 다시 말해 국내 모든 증권사들이 NCR 비율을 200% 이상으로 맞추고 있는 뜻이다. 이는 그만큼 국내 증권사의 재무건전성이 '매우 양호'함을 나타낸다.
문제는 NCR 비율이 '지나치게' 높다는 것이다. 박종수 금융투자협회장은 지난해 초 취임 1주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증권사의 재무건전성을 보여주는 NCR은 150%면 충분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업계에 따르면 은행의 건전성 잣대인 BIS비율 8%를 NCR로 환산하면 100%다. 증권업계 평균이 600%를 넘는다는 것은 은행보다 여섯배나 높은 '안전성'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한다.
◆ 국민연금 때문에 NCR 비율 높여
증권업계의 NCR 비율이 높아 재무건전성이 양호하다는 것은 뒤집어보면 돈을 활발하게 굴려야 할 투자회사가 자본을 비효율적으로 '쌓아놓고'만 있다는 얘기도 된다.
이렇듯 증권사들이 NCR 비율을 높게 유지한 이유는 '국민연금' 때문이다. ELW(주식워런트증권), ELS(주가연계증권), DLS(파생결합증권) 등의 상품을 운용하려면 NCR 비율을 신경쓸 수밖에 없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최대고객인 국민연금을 놓칠 수 없다는 계산이 더 강하다.
국민연금은 이번 조치 이전까지 거래증권사 선정 시 NCR비율을 450% 이상(만점)으로 잡았다. 따라서 증권사들은 수익성이 악화돼도 NCR 비율 유지를 위해 자본을 쌓아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지난해 초에는 업황 부진으로 NCR 비율이 크게 하락한 중소형사들이 대거 후순위채권 발행 등을 통해 NCR 비율을 올리기도 했다.
더불어 해외에 지점을 내거나 ELS(주식결합증권)·DLS(파생결합증권) 등 인기 있는 상품을 내놓을 때마다 파생상품이라는 이유로 NCR비율은 내려가기 마련이다.
또 한국거래소도 ELW 상장·CCP(장외파생상품 중앙청산소) 청산회원·합성 ETF 거래 증권사에 대해선 NCR 비율 250% 이상 유지를 요구함에 따라 증권사들은 NCR 비율을 낮추는 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 증권사, 자금운용 숨통 트일 듯
국민연금의 NCR 규제완화로 인해 증권사들은 당장 트레이딩부문에서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그동안 쌓아놓고 있던 자금을 '운용'할 수 있기 때문.
또한 기업에 대한 대출여력도 늘어났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증권사의 NCR이 평균 250% 수준으로 낮아지면 지난 3월 기준 국내 5대 증권사의 자기자본 16조원 중 기업대출에 활용할 수 있는 여력은 6조1000억여원이나 되는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대형증권사들의 경우 볼륨이 있는 상품을 내놓기가 쉽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호재라는 분석이다.
이철호 한국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대형증권사들이 기업대출과 같은 생소한 업무에 대해서는 리스크 관리 역량을 축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중·소형사들에 비해 제공하는 서비스와 상품의 라인업이 크게 차별화돼 신규고객 유치 측면에서는 장기적으로 긍정적"이라고 밝혔다.
호재인 것은 분명하나 보완할 점이 많다는 견해도 나왔다. 이번 NCR 규제완화를 비롯 정부의 자본시장 역동성 제고방안 등 증권업계를 활성화시키려는 정책이 쏟아지고 있지만, 지금의 틀과 잣대로는 대형 IB 출현 등 근본적인 여건 개선이 어렵다는 지적이다.
한정태 하나대투증권 애널리스트는 "대형 IB로 가는 회사에 대해서는 NCR 규제를 푸는 정도가 아니라 바젤과 같은 자본규제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1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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