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52번가 하수구 안. 노란색 애벌레(옐로)와 빨간색 애벌레(레드)가 서로 뒤엉켜 넘어지고 굴러다니며 나름 치열한(?) 싸움을 펼친다. 대사 한마디 없이 90초라는 짧은 시간 동안 한정된 배경 안에서 두마리의 벌레가 아웅다웅하는 모습뿐인 데도 보는 이로 하여금 유쾌한 웃음을 짓게 하는 매력이 있다.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벌레 두마리'

버스와 지하철, 미용실 등 스크린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와 대한민국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슬랩스틱 코미디 애니메이션 <라바>(Larva) 속 두 주인공은 지난해 시즌2에선 깔끔한 가정집으로 거처를 옮긴 데 이어, 올해 드디어 세상 밖으로 뛰쳐나올 준비를 마쳤다. 이는 지난해 '2013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국내를 점령한 뒤 이제는 글로벌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준비를 마친 '라바의 아버지' 김광용 투바앤 대표도 마찬가지다.


사진=머니위크 류승희 기자

"20개국이 넘는 국가와 에이전시 계약을 맺었습니다. 올해까지 40개국으로 늘리는 게 목표죠. 지금 당장 성공의 포부를 밝히는 것은 무리지만 국내 첫 글로벌 캐릭터 탄생의 주인공이 <라바>가 됐으면 하는 바람은 숨길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캐릭터시장은 전세계의 5% 수준. 해외로 눈을 돌리면 그만큼 먹거리가 풍성해진다는 얘기다. 캐릭터 콘텐츠사업 가능 국가가 70여개국임을 감안하면 탄생한 지 올해로 4년차에 접어든 <라바>로선 굉장히 빠른 속도로 글로벌화에 돌입한 셈이다. 전세계 사람들이 지하철과 버스, 각 가정에서 <라바>를 보며 웃음 짓는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라바>로 대히트를 친 김 대표지만 처음 캐릭터 콘텐츠사업에 뛰어들었을 때부터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니다. <비키와 조니>, <오스카의 오아시스> 등 여러 편의 애니메이션 작품을 만들었지만 모두 대중의 반응을 끌어내진 못했다. 투자자들의 손길이 끊기는 것도 당연했다. 회사 문을 닫을 수도 있었던 위기상황에서 투바앤과 김 대표를 살려낸 구원투수가 바로 <라바>다.


"<라바> 이전의 캐릭터들에 대한 애착심이 큽니다. 결단코 기획력이나 캐릭터의 힘이 떨어져서 실패했다고 생각지 않아요. 당시엔 유통과 마케팅적인 측면에서 약했죠. 향후 재무적인 건전성이 더 높아지면 이전 캐릭터들을 다시 되살리는 방안도 연구 중입니다. 모두 <라바> 못지않은 매력을 가지고 있으니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라바>와 같은 캐릭터가 탄생하기까지 걸리는 시간과 노력은 어느 정도일지 궁금했다. 게다가 힘들게 탄생한 대박 캐릭터일지라도 지금까지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국산 캐릭터는 그 수명이 너무도 짧았던 경우가 허다하다. <라바>는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캐릭터는 한사람의 아이디어에 의해 '탁' 하고 나올 수도 있지만 팀워크에 의해서 나오기도 합니다. 보통 팀워크를 통한 개발단계를 살펴보면 기획에서 상업화까지 최소 5년의 세월이 필요합니다. <라바>의 경우 그 절반에서 끝낸 케이스인데 매우 빠른 편이라고 할 수 있죠. 과거 <마시마로>처럼 대박을 쳤음에도 뒷심이 부족해 사라진 캐릭터들이 많은데 원인은 산업화의 실패에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캐릭터 콘텐츠의 산업화가 제도적으로 구축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의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수익모델을 창출하기까지 어려움이 많죠. 여전히 어느 캐릭터 하나가 뜨면 봉제인형을 만들어보자는 수준에 머물러 있으니까요."

국내의 환경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선 결국 캐릭터의 글로벌화가 필수적이라고 김 대표는 말한다. 가수로 치면 싸이처럼 혜성 같이 나타나 빅히트를 치는 사례가 나와야 한다는 것인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벌시장을 향해 꿈틀거리고 있는 <라바>를 향한 기대와 희망은 결코 작지만은 않다.
 
사진=머니위크 류승희 기자

◆"캐릭터의 힘은 끝이 없다"

최근 국내 개봉 애니메이션 영화로는 최초로 관객수 600만명을 돌파한 디즈니 <겨울왕국>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겨울왕국>은 캐릭터의 힘은 물론이거니와 음악, 즉 소리의 힘도 굉장하다는 사실을 재증명해보인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 OST 주제곡 '렛 잇 고'(Let It Go)가 계속해서 회자되면서 해당 캐릭터의 인기도 덩달아 올라갔다. 배경음악이나 대사가 일절 없는 <라바>에게 이러한 추세가 부담으로 다가오진 않을까.

"사실 <라바>만의 절대적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한정된 공간, 적은 등장인물, 절제된 효과음 등은 기획 당시 재정적 환경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타협된 면도 없지 않아요. 우리가 가진 것들로 최대의 효과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한 산물이 바로 <라바>인거죠. <겨울왕국>을 보면서 저희도 느낀 점이 많습니다. <라바>는 90초짜리 초단편인데다 여러모로 <겨울왕국>과는 정반대의 성격일 수도 있거든요. 추세에 맞춰 따라가려는 건 아니지만 <라바>도 곧 음악적인 콘텐츠를 양산해낼 계획입니다. 예전부터 기획해온 것들이죠. 뮤직비디오도 제작 준비 중이며 극장 개봉용 영화로도 곧 찾아뵐 예정이에요. 수준 높은 음악을 접목시키기 위해 유능한 작곡가 및 프로듀서들과 접촉 중입니다."

역시 준비가 투철한 김 대표다운 답이었다. 단순히 90초짜리 단편 애니메이션에서 머무는 것만이 아니라 나름의 생존전략과 발전방향을 모색해두고 있는 것이다. 김 대표의 이러한 캐릭터 콘텐츠 산업화 능력과 혜안 덕분에 <라바>는 어느새 3만여가지의 캐릭터 상품을 출시했고 800가지 카테고리의 산업분야에 진출해 있다. 이제는 연매출 100억원을 바라보는 회사로 성장해 '캐릭터 기업'으로 가기 위한 첫걸음을 떼고 있다.

"캐릭터의 힘은 무궁무진합니다. 하나의 히트 캐릭터를 만들어내면 영화·게임·완구 등 2차 콘텐츠사업으로의 확장이 무한정 가능해지고 언어·지리·인종 등 문화적 진입장벽이 낮아 해외진출도 용이하죠. 또한 캐릭터 하나가 대중에게 사랑받고 인지되는 과정이 어렵지만 한번만 인지되면 그 충성도가 매우 높고 지속성이 길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김 대표는 정부의 지원이 많아지고 대중의 관심도 늘어났지만 여전히 캐릭터시장에 종사 중인 인력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만들어지는 작품이 많아야 그 중에서 뛰어난 작품이 탄생할 확률이 높아지는데 애초에 기획단계에서 무너지는 작품들이 많다보니 국산 애니메이션 캐릭터산업의 큰 발전을 바라기에는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다.

"캐릭터 콘텐츠 선진국들처럼 캐릭터의 상업적 가치가 객관적으로 평가돼 이를 담보로 장기간 투자할 수 있는 성숙한 시장이 우리나라에도 조성됐으면 좋겠습니다. 캐릭터라 함은 컴퓨터나 TV처럼 한번 뚝딱 만들어낸 것을 가지고 바로 그날에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거든요. 최소 5년 이상 하나의 캐릭터가 상업화되는 순간까지 투자가 이뤄질 수 있는 펀드나 투자사가 생겨나야 앞으로 국내 캐릭터시장 전반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을 겁니다."

끝으로 김 대표와 <라바>의 다음 행보를 물었다. 올해는 후속작을 선보이는 동시에 극장용 애니메이션 제작을 위한 투자자원을 끌어모으는데 주력할 계획이라고 한다. 시즌2에서 3분30초로 늘어났던 시간은 후속작에선 다시 90초로 돌아간다. <라바>와 투바앤의 강점인 코미디, 즉 웃음을 향한 열정도 어김없이 지속될 예정이다.

"현재 <라바> 외에 신캐릭터를 하나 집중개발 중입니다. 아마 4월 중 만나볼 수 있을 것 같네요. 완구사업과 연계된 로봇물로 이 역시 코미디를 기반으로 제작할 계획입니다. 지금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대한민국을 넘어 전세계가 라바와 투바앤을 통해 웃는 날까지 멈추지 않겠습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1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