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F는 본래 저평가된 기업을 인수해 비효율적인 구조를 혁신하고 기업가치를 끌어올려 되파는 금융의 '메기' 역할을 수행하도록 기대됐다. 사진은 안호이저부시 인베브(AB 인베브)와 콜버그 크래비스 로버츠(KKR),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어피너티)가 2014년 서울 중구 소공동 웨스턴조선호텔에서 오비맥주를 인수하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완료했다고 발표하는 모습. 미쉘 두커리스 아태지역 CEO(왼쪽부터), 오비맥주 장인수 사장, AB 인베브의 카를로스 브리토 (Carlos Brito) 글로벌 CEO가 취재진을 향해 건배를 하고 있다. /사진=뉴스1
"저희는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자본시장의 '메기'입니다."

한때 사모펀드(PEF) 운용사들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PEF는 본래 저평가된 기업을 인수해 비효율적인 구조를 혁신하고 기업가치를 끌어올려 되파는 역할 수행이 기대됐다. 2014년 오비맥주 매각 사례가 바람직한 예시로 꼽힌다. 외국계 PEF 콜버그크라비스로버츠(KKR)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7월, 오비맥주를 18억달러(약 2조3000억원)에 인수했다.


KKR은 시설 투자에 2000억원을 투입하고 마케팅 비용을 30% 늘리는 등 '통 큰 투자'로 경영 효율화, 브랜드 고급화, 수익 구조 개선을 추진하며 오비맥주를 국내 최고의 주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기업 가치를 극대화한 후 KKR은 오비맥주를 세계 1위 맥주기업인 안호이저-부시 인베브(AB인베브)에 58억달러(약 6조1680억원)에 매각해 약 4조원의 수익을 올렸다.

국내 사모펀드(PEF)가 본래의 목적인 '기업 구조 개선을 통한 중장기 가치 제고'에서 벗어나 오로지 '단기 차익 실현'에만 골몰하는 행태로 인해 산업 전반의 건전성을 심각하게 위협한다는 비판이 연일 쏟아지고 있다.사진은 김광일 홈플러스 대표이사(왼쪽)와 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이 지난 1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홈플러스 사태 관련 질의를 듣고 있는 모습. /사진=뉴스1
최근 국내 PEF들은 본래 목적인 기업 구조 개선을 통한 가치 제고는 외면한 채 단기 차익 실현에만 골몰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수천억원의 이익을 내던 홈플러스가 국내 최대 PEF 운용사인 MBK파트너스의 인수 이후 10년 만에 기업회생 절차에 내몰렸다. MBK는 홈플러스 인수 당시부터 부동산 매각과 투자 축소를 병행하는 현금 회수 구조를 설계해 논란이 됐다.

PEF 인수 이후 성장세가 꺾여버린 기업은 비단 홈플러스뿐만이 아니다. 국내 5대 PEF 운용사(한앤컴퍼니·MBK파트너스·스틱인베스트먼트·IMM프라이빗에쿼티·IMM인베스트먼트)가 소유했거나 소유하고 있는 58개 기업을 분석한 결과가 이를 방증한다. 리더스인덱스에 따르면 매각된 18곳을 제외한 40개 기업의 지난해 매출은 평균 24.9% 증가했지만 당기순이익은 88.2%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PEF 부실 경영의 근본 원인은 펀드 구조에 내재된 '시간 압박'에서 비롯된다. PEF는 통상 7년에서 10년의 만기를 두고 운용되는데 운용사는 출자금 집행이 늦어질수록 받는 보수가 줄어든다. 이러한 구조가 충분한 실사 없이 '일단 사고 보자'는 식의 성급한 인수로 이어지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인수 실패 확률이 높아지지만 펀드 만기 내 성과를 입증해야 다음 펀드 조성이 유리해지는 구조 탓에 운용사는 단기 성과 중심의 경영에 몰두한다. 기업의 본질적 경쟁력 강화보다는 단기 회수(Exit)에 집중하는 이른바 '팔기 위한 경영'이 고착화되는 이유다. 이 과정에서 재무 지표를 부풀리기 위한 알짜 자산 매각, 인위적 구조조정, 고배당 등이 빈번히 동원된다.
LBO의 덫… 고(高)레버리지 인수가 낳는 기업 부실
PEF의 대표적인 인수 방식인 차입매수(LBO)도 부실 경영을 초래하는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그래픽은 국내 기업의 LBO 현황. /그래픽=강지호 기자
차입매수(LBO)도 부실 경영을 초래하는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LBO는 PEF가 자기자본 대신, 인수 대상 기업의 자산과 미래 수익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인수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이다. 이론적으로는 적은 자본으로 효율적인 경영이 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인수된 기업이 막대한 부채를 떠안게 되면서 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가로막고 부채 상환 압박으로 파산 위험을 키운다.

주방용품 업체 락앤락의 사례가 이 같은 LBO의 폐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락앤락은 2017년 홍콩계 PEF 운용사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에 인수된 지 7년 만인 지난해 상장폐지 절차를 밟았다. 당시 어피너티는 락앤락 지분 인수에 약 6293억원을 투입했는데 이 중 3750억원을 LBO를 통해 조달했다. 이후 경영 효율화를 명분 삼아 국내외 공장을 매각하고 고배당과 유상감자로 투자금 회수에 치중한 결과 인수 당시 1조원을 웃돌던 시가총액은 2023년 2690억원까지 쪼그라들었고, 영업이익은 2023년 적자로 돌아섰다.

최근 들어 PEF의 투자 타깃은 '구조조정 기업'에서 '경영 승계 기업' 등 경영권 분쟁 가능성이 있는 기업으로 옮겨가고 있다. 사진은 고려아연의 경영권 분쟁 사태가 격화된 지난 1월 문병국 고려아연 노조위원장을 비롯한 노조원들이 고려아연 임시 주주총회가 진행되는 서울 용산구 그랜드 하얏트 서울에서 영풍과 MBK파트너스 규탄 피켓 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스1
최근 PEF 투자 타깃은 '구조조정 기업'에서 '경영 승계 기업' 등 경영권 분쟁 가능성이 있는 기업으로 옮겨가고 있다. 대기업 구조조정 시장이 포화되자 지분 희석과 경영권 갈등이 예고된 경영체제가 새로운 먹잇감으로 떠올랐다. 국내 산업계에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고려아연 사태가 대표적이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확산과 '주주가치 제고' 흐름이 맞물리면서 소액주주들이 오히려 사모펀드 측을 지지하는 현상까지 나타나며 PEF의 힘이 더욱 막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PEF 경영권 개입은 기업 내부와 사회에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경영 승계를 앞둔 기업에 PEF가 개입할 경우 지분 분쟁이 격화돼 기업 지배 구조가 불안정해진다. 기업 내부에 혼란이 야기되고 장기적인 비전과 연구개발(R&D) 투자 등 지속 가능한 성장 전략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데 방해가 된다. 고용 불안, 협력업체 피해, 소액주주 손실 등이 발생해 사회 전체가 비용을 치르기도 한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는 "MBK·홈플러스 사례가 보여주듯 PEF들이 단기적·중기적 수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협력업체와의 상생이나 투명한 경영과는 역행하는 부분이 생길 수 있다"며 "정부가 PEF의 역기능이 초래할 수 있는 문제점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보안과 대책을 마련해야 할 시점"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