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을 살고 있는 직장인에게 햄릿의 명대사 ‘죽느냐, 사느냐’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됐다. 직장인들은 ‘버티느냐, 나가느냐’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최근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희망퇴직·명예퇴직 등의 인력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나가게 된 노동자가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생존을 위해 희망퇴직을 단행하는 기업들과 일정의 위로금을 지급받고 거리로 내몰리게 된 노동자들이 급증하고 있는 것. 이에 <머니위크>는 희망퇴직이 일상화된 대한민국의 오늘을 진단하고,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희망퇴직자와 초강수를 둔 기업들의 속사정을 들여다봤다. 또 2016년으로 예정된 정년연장 법안의 실효성과 해외의 구조조정 사례 등 ‘희망퇴직의 시대’를 다각도에서 조명했다.

# 대기업 S사 직원 A씨. 30대 후반인 그는 얼마 전 승진을 했음에도 회사를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지 불안하기만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 전 50대 B부장의 퇴사를 지켜봤기 때문. A씨는 "제가 임원이 안돼도 조직에서 버틸 수 있을까요? 그럴려면 철면피가 돼야 할 겁니다. 그게 우리 대기업이에요"라며 한숨 지었다. 그는 정년이 60세로 연장된다고 해도 큰 변화가 생길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요즘 그는 세무사나 회계사 자격증 수험서를 자주 펼친다. 임원이 될 확률은 낮고 그렇다고 비임원으로 60세까지 버틸 엄두도 나지 않으니 제3의 길을 준비하겠다는 것이다.


임원이 될 것인가, 비임원으로 가늘고 길게 60세까지 버틸 것인가. 비임원 정규직 직원의 정년을 60세까지 보장하는 '정년 60세 의무화' 규정을 바라보는 대기업 사원들의 고민이다.

'고용상 연령 차별금지 및 고령자 고용촉진에 관한 법 개정안'에 따라 300인 이상 사업장과 공공기관은 오는 2016년부터 정년을 60세로 연장해야 한다. 의무화 시점에 앞서 임직원 정년을 60세로 연장한 기업도 있다. 바로 삼성전자와 SK텔레콤이다. 두 기업은 올해부터 각각 55세, 58세였던 정년을 60세로 늘렸다.

두 회사는 정년연장과 함께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는데 SKT의 경우 만 59세부터 매년 전년 연봉을 기준으로 임금을 10%씩 줄이기로 했고, 삼성전자는 만 56세부터 임금을 10%씩 감액하기로 했다.


이밖에 KT가 내년 1월1일부터 정년을 60세로 연장하는 것을 목표로 노사가 협의 중이며, LG유플러스 사측도 조속한 시일 내에 정년을 60세로 연장할 수 있도록 논의하자고 노조 측에 제안한 상태다.

하지만 정작 '정년 60세 연장' 적용대상이 되는 조직 구성원의 반응은 무덤덤하다. 대기업 조직 분위기상 나이든 부·차장들은 정년을 채우기 전 알아서 퇴임할 것이기에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 '상위 1%' 임원 못 되면 정년 채우긴 하늘의 별따기

정년 60세와 임금피크제를 동시에 시행하는 삼성전자와 SKT. 두 회사의 전직원 대비 임원 비중은 각각 1.2%, 0.25%다. 삼성전자는 9만8387명의 직원 가운데 1200명이, SKT는 4000여명의 직원 중 90명이 임원 타이틀을 달고 있다.

그렇다면 9만7000여명, 3900여명 가운데 임원이 되지 못한 나이든 '선배'들은 얼마나 자기의 자리를 지키며 근속하고 있을까. 두 회사의 근속연수를 볼 때 '선배'들의 자리는 쉽게 보장되지 않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두 회사의 평균 근속연수는 삼성전자가 9.2년, SKT가 12.4년이다.

한국고용정보원이 발표한 2012년 상반기 대졸 신입사원의 평균나이는 남자 33.2세, 여자 28.6세. 이를 두 회사의 평균 근속연수에 단순 적용하면 삼성전자의 경우 신입으로 입사해 남자는 평균 42.4세, 여자는 37.8세까지 근속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SKT의 평균 근속연수에 적용하면 남자는 평균 45.6세, 여자는 41세다. 이 이상의 나이에서 임원을 달지 않으면 소위 '눈치 보이는' 입장이 되기 십상이다.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시가총액 기준 상위 10개 기업의 지난해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임원 평균 나이는 50.4세. 하지만 이 회사에는 최연소 임원 승진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노태문 부사장을 비롯해 '최연소 임원 승진' 절차를 밟은 임원들이 속속 등장하는 등 젊은 임원이 많아지는 추세다.

노태문 부사장의 경우 포항공대(박사)를 나와 2007년 39세 나이로 삼성전자 최연소 임원(상무)으로 승진했다. 이후 2010년에는 상무에서 전무로, 2012년에는 부사장으로 고속승진했다. 노 부사장은 현재 삼성전자 부사장급 이상 임원 중 오너인 이재용 부회장을 제외하곤 가장 젊다.

상위 1%의 '임원'자리로 이동하는 '후배'들이 많아질수록 뒤에 남는 나이 찬 '선배'들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지사. 현재까지 이러한 '선배'들은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나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고 이 회사 재직자는 말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최근 1964년생 부장 한명이 퇴사했다"며 "상위 1% 임원이 못 되면 정년 채우기는 사실상 힘들고, 임원이 못된 채 정년을 채우는 분들도 거의 못 봤다. 정년 60세가 보장된다고 해서 이러한 분위기가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SKT의 한 직원은 "정년 60세 시대가 왔다는 것은, 임원을 목표로 할 것인지 아니면 차장으로 60세까지 다닐 것인지 개인이 자기 노선을 택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이라며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임원을 목표로 회사에 다닌다. 따라서 임원으로 승진하면 정년 60세 보장 대상에서 벗어나는 만큼 정년 연장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직원은 별로 없다"고 전했다.

한편 시가총액 기준 상위 10개 기업의 지난해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네이버의 임원 평균 연령은 46.1세로 가장 젊고, SK하이닉스는 51.0세, 삼성생명은 52.1세, LG화학은 52.4세로 나타났다. 기아자동차는 53.9세, 현대모비스는 54.4세, 포스코는 55.9세, 현대중공업이 56.0세, 현대자동차가 57.5세로 조사됐다. SKT의 경우 약 49세(사업보고서에 따른 임원들의 나이를 N분의1로 나눈 수치)다.
 

◆ 구성원 시각전환·친화형 시스템 필수

그렇다면 정년 60세 의무화 규정이 실효를 거두려면 무엇이 전제가 돼야 할까. 대기업 재직자들은 무엇보다 입사 동기나 후배가 임원으로 승진해도 회사에 남아 있는 것이 '죄스럽지 않게' 느껴지도록 분위기가 조성되고 조직구성원의 시각도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삼성전자 한 재직자는 "정년까지 다닌 사람을 보지 못했을 뿐더러 나이 많은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며 "나이든 부장 한명을 '-5명'으로 여기는 시각이 있는 게 사실인데, 정년 60세 의무화 규정이 의미를 가지려면 이러한 인식부터 바꿔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또 다른 직원은 "나이 든 부장, 차장에게 새로운 기술이나 프로세스 등을 설명하는 일이 힘든 건 사실"이라며 "그래서인지 나이든 비임원에게 '너 아직도 다니고 있냐'고 대놓고 말하는 임원도 있더라"고 털어놨다.

직원들의 시각 전환과 함께 회사가 '정년 60세 시대'에 맞는 친화적 시스템을 갖추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임원이 아닌 60세까지 정년을 채우는 길을 선택한 직원들이 조직에서 소외되지 않고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정년 60세 시대'에 맞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3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